자유연애라 쓰고, 자기연애라 읽는다
이광수의 「어린 벗에게」(창비)
자유연애라 쓰고, 자기연애라 읽는다
이광수의 「어린 벗에게」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총 네 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수신자인 ‘어린 벗’에 대한 정보는 화자가 병들었을 때 간병을 했고, 서로에게 깊은 애정이 있으며, 한강가에 머물고 있다는 정도이다. 흥미로운 것은 화자가 작품 속에서 품는 연정의 대상이 무려 넷이라는 사실이다. 어린 벗, 청복을 입은 여인(후에 김일련으로 밝혀짐), 김일련, 그리고 김일련의 오빠 김일홍. 김일홍 앞에 붙은 ‘군’이라는 호칭에도 불구하고, 묘사된 신체적 접촉과 감정의 결로 미루어 보아 화자는 양성애적 감정을 지닌 인물처럼 보인다. 사랑이 넘치는 인간, 혹은 너무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화자는 어린 벗에게 자신의 연애사를 솔직히 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털어놓는다. 기혼자의 신분으로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합리화하려는 속내가 노골적이다. 결국 그의 편지는 “기혼자이지만 사랑을 택했고, 두려움과 불확실 속에서도 그 사랑을 따라 나아가겠다”는 선언으로 귀결된다.
화자는 동경 와세다(구 조도전) 유학 시절 친구 김일홍의 여동생 김일련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기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거절당하고 실연의 고통 속에서 방황한다. 1년여 동안 음주와 나태에 파묻힌 그는 결국 정신을 가다듬고 ‘동족 교화’라는 대의를 품으며 일본을 떠난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병을 얻어 쓰러지고, 그를 정성껏 간호한 청복의 여인이 사실은 김일련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서로를 떠난 세월 동안 김일련은 촉망받는 유학생과 약혼했으나, 약혼자가 폐병으로 사망해 비운의 여인이 된다. 그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예술에 바치겠다 다짐하고 베를린 유학길에 오르지만, 그 배는 수뢰를 맞아 침몰한다. 마침 선진 국가를 구경할 목적으로 구라파를 거쳐 가려는 화자도 승선해 있어 죽음의 경계를 넘어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그 속에서 다시 만난 김일련 역시 같은 공포를 통과한 사람이다.
막 삶을 되찾은 두 사람은, 아직 죽음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채 기차에 몸을 싣는다. 목적지도, 계획도 없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단지 살아남은 자들이 발 디딘 다음 자리일 뿐이다.
“나는 이제는 명일 일을 예상할 수 없고 순간 일을 예상할 수 없나이다. 다만 만사(萬事)를 조물의 의(意)에 부(付)하고, 이 열차가 우리를 실어가는 데까지 우리 몸을 가져가고 이 영혼을 끌어가는 데까지 우리는 끌려가려 하나이다.”
이 작품은 《무정》이후 발표되었으며, 자유연애 사상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연결된다. 《무정》의 형식이 정혼녀 영채를 떠나 선형을 택하듯, 이 작품의 화자 역시 아내보다 사랑을 택한다. 여기에는 작가의 현실 경험이 짙게 스며 있다. 이광수는 실제로 폐병으로 쓰러졌을 때 허영숙의 간호를 받으며 연정을 품었고, 1918년 이미 기혼 상태에서 그녀와 함께 베이징으로 도피했다. 이후 ‘신생활론’, ‘자녀중심론’을 발표하며 전통 혼인제도를 비판하고 자유연애를 옹호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어린 벗에게」는 바로 그 격동의 시기, 작가가 자신이 취하려는 사랑과 행위에 대해 미리 문학적 변론을 펼친 선전장이기도 하다. 작품 속 화자는 조선의 혼인을 “짐승의 자웅을 사람의 마음대로 붙여 놓은 것”이라 폄하하며 사랑 없는 결혼을 부정한다. 일본에서 목숨을 건 정사(情死)를 찬미하며 “사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을 이상화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숭고하다기보다 어딘지 자기애적이고 감상적이다. 결국 그는 실연과 방황을 거쳐 대의를 꿈꾸지만, 다시 사랑에 무릎 꿇고 떠난다. 근대적 인물이라기보다 감정의 기세에 흔들리는, 한 인간의 유약한 모습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과도한 우연의 장치를 통해 사랑의 결말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근대소설의 한계를 드러낸다. 운명이 개입해야만 완성되는 사랑은, 사실 가장 현실과 멀리 떨어진 사랑이다. 이광수는 여기서 사랑을 혁명의 언어처럼 말하지만, 그 사랑은 결국 누군가의 자리를 비워야 완성되는 사랑이다.
자유연애는 아름답다 말했지만, 그 자유는 이미 누군가에게 의무가 되어 있던 사랑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얻어진 자유였다. 사랑은 개인의 권리이고 욕망이지만, 그 욕망이 타인의 고통을 딛고 설 때 그것을 과연 ‘근대적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근대의 문턱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미화하려 했던 한 지식인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그가 말한 ‘조물의 뜻’은, 실은 자신이 선택한 욕망의 방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유연애’라 쓰고, ‘자기연애’라 읽은 건 아닐까. 타인을 사랑한다는 명분 아래, 사실은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 사람. 그는 사랑을 품었다고 믿었지만, 그 사랑 안에서 더 깊이 흔들리고 있던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결국 그가 붙잡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서 흔들리는 자기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