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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51

사람이 풍경이던 시절

by 인상파

박태원의 《천변풍경》(문학과지성사)

사람이 풍경이던 시절

재봉이, 창수, 이쁜이, 점룡이, 기미꼬, 하나꼬, 금순이… 불러보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이름들이다. 사람이 곧 풍경이던 시절이 있었다. 도시가 거대해지기 전, 건물과 간판보다 사람이 거리를 채우고, 서로의 이름과 사연이 삶의 배경이 되던 시절 말이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서민들의 숨결과 체온이 골목마다 스며 있던 그 시절이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1930년대 사람들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작품의 ‘풍경’은 계절마다 물빛이 달라지는 산수의 풍경이 아니다. 물론 청계천에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스며들고, 물빛과 바람의 결이 바뀌지만,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사람의 풍경, 곧 가난과 희망, 체념과 버팀으로 얼룩진 도시 서민의 삶이다. 이발소, 한약국, 카페, 포목점, 빨래터, 목욕탕 등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름들, 재봉이, 창수, 금순이, 이쁜이, 하나코, 귀돌 엄마, 민주사, 포목점 주인… 그들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천변을 오갔다. 이 작품의 ‘풍경’은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풍경, 삶의 결이 켜켜이 쌓인 도시의 장면들이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세태소설로 유명하다. 세태소설이란,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 사회적 분위기와 인간 군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소설을 말한다. 거대한 사건이나 비범한 인물이나 특정 인물이 중심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희로애락이 중심이 된다. 세태소설은 한 시대의 사회 분위기와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 생활의 냄새까지 담아낸다. 그들의 삶이 한 시대를 말하고, 그 일상 하나하나가 당시 도시 서민의 풍속과 감정의 결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천변풍경》은 단순한 근대 소설이 아니라, 1930년대 청계천가의 생활사를 기록한, 그 시대 사람들의 삶, 말투, 풍습, 분위기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후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기록물이 아닐 수 없다.

박태원은 당대 도시 서민들의 사람살이, 즉 풍속을 카메라 기법으로 포착한다. 인물의 내면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이발소, 천변의 길목, 빨래터와 카페, 한약방 같은 공간을 통해 보이는 그대로의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서술자는 설명자가 아니라 관찰자가 되고, 독자는 감정을 강요받기보다 그 시대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 한숨과 웃음을 스스로 읽어낸다. 이처럼 박태원은 청계천을 배경으로, 군중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을 렌즈처럼 담담하게 따라가며, 1930년대 도시의 결을 차분히 기록한다. 그 결과 〈천변풍경〉은 사건 중심의 소설이 아니라, 사람 중심· 생활 중심의 풍속 기록이자, 한 시대의 공기와 생활 감정이 스며 있는 문학적 필름이 된다.

특히 이발소 심부름꾼 재봉이는 유리창 너머 천변 사람들을 관찰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존재로, 작품 속 ‘눈’이자 ‘현장 카메라’처럼 작동한다. 이러한 카메라적 시선은 작품 속 인물 재봉이의 존재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재봉이의 시선은 감정적 해석이나 주관적 평가 없이,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담담하게 중계한다. 이러한 관찰자적 위치와 움직임은 소설 속 ‘현장 카메라’처럼 작동하며, 박태원의 객관적 묘사 방식이 구현되는 중요한 장치를 이룬다. 따라서 작품의 카메라식 표현은 단순히 문체상의 특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봉이와 같은 인물을 통해 근대 도시의 일상과 군상(群像)을 렌즈의 움직임처럼 그려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재봉이가 청계천 사람들의 이야기를 눈에 담아 전하듯, 청계천에 빨래를 하러 모인 아낙들은 입으로 시대의 소문을 풀어내는 전달자가 된다. 시골에서 올라온 금순이며 이쁜이의 시집살이, 민주사, 포목집, 신전집, 약국집의 사정들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물이 흘러가듯 이야기도 흘렀다. 청계천의 흐름이 도시의 낮은 곳을 적셨다면, 아낙들의 입담은 그 시대 사람들의 속사정과 체온을 고스란히 전했다. 재봉이가 ‘눈’이라면, 빨래터 아낙들은 ‘입’이다. 서로 다른 통로이지만 둘 다 그 시대를 기록하고 전하는 매개체였다.

작품에서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이야기는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희망을 품었다가 번번이 꺾여버린 여성들의 삶이다. 금순이는 첫 혼례날 신랑이 달아나 어린 신랑과 다시 결혼하지만, 시어머니의 눈칫밥에 시달리고 끝내 어린 남편마저 잃는다. 곱게 자란 이쁜이는 남편에게 소박을 맞아 시댁 부엌데기로 전락하고, 기생 하나꼬는 재산 있는 이혼남에게 시집가지만 버림받고 고된 시집살이에 시들어간다.


이들의 운명은 단순히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가난과 가부장제가 맞물린 시대가 여성에게 부과한 구조적 비극이었다. 민주사나 이쁜이 남편 강서방 같은 재력가나 그만그만한 남자뿐만 아니라 만돌아비처럼 최하층의 망나니 같은 남자조차 아내를 정착된 삶의 일부처럼 취급하고 바람을 피우는 모습에서 그 시대의 잔인한 현실이 드러난다.


청계천은 공유지였으나, 그곳에서 빨래를 하려면 사용료를 내야 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공공의 물을 쓰면서도 공간을 빌려야 하는 모습은 봉이 김선달의 대동강 물장사를 떠올리게 한다. 어딘가 시대착오적이면서도, 오늘의 유료 빨래방과 닮아있다. 1930년대 서울은 이미 그렇게 근대 도시의 자본 논리와 생활 질서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장마가 들자 청계천이 범람하고, 다리 밑 움막에서 살던 꺽정이들이 허리까지 물에 잠겨 보잘것없는 살림이라도 챙기려 애쓰는 장면은 아슬아슬하다. 그것은 단지 소설 속 풍경이 아니라, 최근 집중호우로 반지하에서 삶터를 잃은 이웃들의 얼굴과 겹친다. 비는 잠시 내릴 뿐이지만, 가난한 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의 장마는 좀처럼 걷히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져도, 가장 낮은 자리의 삶은 언제나 가장 큰 풍랑을 먼저 맞는다.

그 시절, 청계천 물은 흘러가고 사람들은 흘러왔다. 누군가는 사랑에 지고, 누군가는 생계에 밀려 언덕을 내려왔고, 또 누군가는 희망 하나 움켜쥔 채 조용히 다리를 건넜다. 청계천 물은 흘렀지만, 그 물가에 서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흐르지 않았다. 그들은 거대한 꿈 대신 하루의 생계를 붙잡았고, 화려한 성공 대신 겨우겨우 버텨낸 하루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그 잔잔한 생존의 의지 속에서 우리는 시간을 건너오는 인간의 얼굴을 본다. 오늘 청계천은 단정한 돌길로 다듬어져 맑은 물이 흐르고 있지만, 그곳에 스며 있던 사람의 목소리와 온기, 젖은 옷자락과 낮은 웃음, 그리고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그 시절 사람들은 서로의 풍경이었고,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물은 흘러가도 사람의 흔적은 쉽게 씻기지 않는다. 오늘 또 다른 도시의 냇가에서, 또 다른 도시의 골목에서, 지금은 어떤 얼굴들이 풍경이 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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