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는 일
살아내는 일
어머니 엉덩이가 올여름 내내 짓물러,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신경을 쓰느라 고생을 했다. 기저귀 발진이라고 하는데, 그 더운 여름 내내 일회용 기저귀를 차고 계시니 상처는 덧나고, 나았다 싶으면 다시 옆으로 옮아갔다. 욕창으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누워계실 때면 기저귀를 열어놓고 엉덩이를 까고 계셔야 했다. 문제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어머니의 소변이었다. 초저녁이고 한밤중이고 간에 어머니가 적셔대는 옷과 이불을 침대에서 걷어내느라 늘 소동이 일었다.
상처 부위에 바르는 약 냄새와 땀 냄새, 기저귀 냄새가 뒤섞인 방 안에서 나는 자꾸만 시간이 묘하게 늘어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한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불어올 무렵, 어머니의 상처는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완치가 아니라, 또 다른 계절을 견디기 위한 잠시의 숨고르기일 뿐이었다. 다시 생긴 상처로 또 고생이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건 어느 정도 그 반려동물의 대소변을 떠안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기저귀를 차신 어머니와 사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기저귀를 갈고, 침대 커버와 옷과 이불을 적셔 빨래통으로 옮기며 내 머릿속은 어지럽다. 어머니의 몸에서 나는 지린내와 체취가 손끝과 옷, 그리고 방 안의 공기 속에 스며 있었다. 처음에는 그 냄새를 견디기 어려워 창문을 열어놓고 방향제를 뿌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냄새가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어머니가 여전히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다는 가장 육체적인 징표였다.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 때면 생의 원점에 다시 서는 기분이다. 한때 어머니가 나를 씻기고 닦으며 키웠던 그 손길이 이제는 내 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오물과 냄새 속에서 생을 견뎌왔다. 깨끗함은 점점 의미를 잃고, 대신 서로의 몸이 닿고 냄새가 스며드는 이 진득한 일상이 가족의 또 다른 정의가 되었다.
가끔은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도맡고 있는 것인가 하고 자문할 때가 있다. 지난주엔 코로나에 걸렸을 때보다 심한 감기를 앓았다. 만사가 귀찮았다. 아침에 제 시간에 일어나 어머니를 깨워 씻기고 입히고 끼니를 챙기고 센터에 보내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내 한 몸 움직이기도 벅찬데 돌봄의 일상은 멈춰주질 않았다. 열로 몸이 뜨거워도, 콧물이 흐르고 기침이 쏟아져도 어머니의 아침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대신할 수도 있었을 일을, 왜 혼자 이토록 매일 떠안고 있는 걸까. 그냥 누워 있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 어머니가 누워 있는 이상, 아무튼 나는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숨소리, 가늘게 흔들리는 손끝, 그것들이 나를 이 세상에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이끄는 힘이라고 해도, 마음의 갈래는 여러 차례 요동을 친다. 그럴 때면 ‘나는 지금 돌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버티고 있는 걸까’라고 묻는다. 그 질문은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돌봄은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때로는 분노와 피로, 연민과 죄책감이 한데 뒤섞여 쓴맛을 낸다.
그럴 때면 다시 눈을 감고 계신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다. 주름투성이의 검버섯 핀 얼굴이 평온하다. 그 얼굴이 내 안에 뒤엉키고 있는 감정의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준다. “그래, 이건 견디는 일이 아니라 살아내는 일이지.” 그렇게 마음을 바꾼다. 어머니의 삶을 붙잡고 있는 건 약도, 돌봄센터도 아닌, 어쩌면 매일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나 역시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 거겠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일 것이다.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는 일.
정말, 그런 걸까.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어쩌면 이미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오른 것이라면,
그건 비참이라기보다,
삶이 끝내 나를 놓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