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이와 뭉텡이
맹이와 뭉텡이
가끔 개처럼 고양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싶다. 더러는 고양이를 개모차에 태워 끌고 다니거나, 캥거루처럼 앞주머니가 달린 띠에 넣어 업고 다니는 사람도 보았다. 하지만 우리 집 맹이는 언감생심, 그런 상상을 해볼 수조차 없는 녀석이다. 데리고 나갔다 하면 일단 도망부터 칠 아이니까.
집에서도 초인종이 울리면 무섭다고 안방으로 뛰어들어 침대 밑에 숨는다. 한참 후 집안 분위기가 안정되면 그제야 어슬렁거리며 방에서 나와 낯선 사람 주위를 돌며 간을 본다. 겁이 많고 소리에 예민해서 일단 앞뒤 가리지 않고 줄행랑을 놓는 녀석이니, 바깥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케이지에 넣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발악을 하니 그 또한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맹이가 ‘동족’을 만날 기회는 아플 때 동물병원에 가거나, 딸아이가 키우는 뭉텡이가 우리 집에 와서 합숙을 할 때뿐이다. 딸은 아주 가깝게 사는 것은 아니어서 자주는 못 오지만, 뭉텡이가 아플 때 엄마 집 근처 동물병원을 이용하고 있어 뭉텡이를 데리고 하룻밤 자고 가곤 한다.
뭉텡이는 성격이 둥글둥글하고 호기심이 많다. 처음 보는 집도 제 집처럼 여기며 맹이라면 감히 건드리지 않는 구석까지 이리저리 둘러본다. 케이지에서 나오자마자 맹이를 쫓아다니는데, 맹이는 그런 뭉텡이가 부담스럽다. 제 영역을 빼앗길까 두려운지 하악질을 하며 도망치고, 침대 밑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해져 간식으로 유혹해보지만, 그 좋아하는 간식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잔뜩 긴장한 채, 오로지 ‘못난이 꼴’을 하고 뭉텡이를 노려보다가 이내 다시 침대 밑으로 숨어버린다.
나는 그런 맹이를 달래보려, 일부러 뭉텡이를 안아주며 질투심을 유발한다. 구경만 하던 맹이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와 뭉텡이 궁둥이 냄새를 맡고, 으르렁거리다 하악질을 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힌다.
처음 뭉텡이가 우리 집에 왔던 날엔 사정이 심각했다. 맹이는 먹지도, 마시지도, 싸지도 않았다. 그런 맹이가 안쓰러워 딸에게 다시는 데려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딸은 알았다. 엄마가 말로만 그렇지, 막상 데려오면 좋아한다는 걸. 그래서 뭉텡이가 아플 때면 꼭 들러 두 고양이의 만남을 주선한다.
서너 번의 만남이 쌓이자 맹이의 경계심도 누그러졌다. 침대 밑에 숨어 있는 시간은 짧아졌고, 서로를 쫓고 쫓기며 달리기 경주를 하고, 꼬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모습도 보인다.
뭉텡이의 눈병은 다행히 단순한 염증이었다. 그러나 밤새 두 녀석이 내 얼굴을 밟고 뛰어다니며 잠을 방해하는 바람에, 나도 녀석들도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리고 뭉텡이가 떠나자, 맹이는 마침내 제 의자에 앉아 고르릉거리며 코를 골기 시작했다. 딸은 집에 도착해 뭉텡이가 잠든 모습을 찍어 보내왔다.
그 사진을 보며 문득 생각났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요하네스 옌센의 그림책 『시장에 간 암소』. 깊은 산골의 아주머니가, 한 번도 제 동족을 본 적 없는 암소를 위해 우시장이 열리자 데리고 나간다. 장사꾼들이 부르는 대로 값을 쳐줄 거라며 팔라고 하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젓는다. 팔려고 데려온 게 아니라고. 집에 소라고는 그 녀석 한 마리뿐이라 녀석이 친구 소를 본 적이 없어 외로울까 봐 데려왔다고. 그리고 한참 후, 아주머니는 그 길을 되짚어 암소와 함께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
뭉텡이가 떠난 뒤 조용해진 집에서, 맹이의 낮은 콧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외로움을 달래는 일은 꼭 말을 나누는 일만은 아니라는 걸. 가끔은 같은 종,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덜 쓸쓸해진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