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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33

쑥의 마음

by 인상파

쑥의 마음

어르신이 택시를 부른 건, 단지 고구마를 사러 가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농산물 도매시장으로 가자며 전화를 걸던 어르신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옆동 할머니를 부른 걸 보니 이미 약속이 돼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릎 관절에 갖은 성인병을 달고 있고, 몸이 불어 걷는 게 힘들지만

아직 휠체어를 탈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어르신은 장애인 콜을 자주 불렀다.

오늘의 외출은 그 모든 사정을 잠시 잊게 만드는, 은근한 설렘처럼 보였다.

10분 거리의 농산물 시장에 도착하자,

어르신은 자색 고구마 한 박스를 고르더니 이번엔 쑥 자루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를 맡으며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끝내 쑥을 놓지 못했다.

겨울이 코앞인데 웬 쑥인가 싶었다. 그건 어르신의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그 뻣뻣하고 줄기가 굵은 쑥이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며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쑥향은 거의 없었지만 잎은 크고 싱싱해 보였다.

7킬로 가까운 쑥을 깎아 3만 원에 부르니, 못 준다던 상인도 어르신의 성화에 결국 쑥을 넘겼다.

오늘 나의 일과는 어르신 댁에서 그 쑥을 다듬고 삶아 헹구는 일이 될 것이었다.

이 가을에 쑥이라니. 시골에서는 이때쯤이면 쑥이 줄기를 키워 어린아이 키만큼 자라 낫으로 쳐내야 했다.

특히 여름이면 모깃불을 놓을 때 피우던 풀이기도 했다.

내게 ‘먹는 쑥’은 봄날 새순이 돋을 때의 그 쑥이었다.

땅이 녹고 논두렁마다 야들야들한 잎이 올라올 때,

어머니와 동네 아줌마들이 쪼그리고 앉아 뜯던 바로 그 쑥 말이다.

그 쑥을 삶아 햇볕에 말리거나 냉동해 두었다가, 명절이면 쑥떡을 빚어 올리곤 했다.

봄쑥은 손끝에만 닿아도 특유의 쌉쌀하고 청량한 냄새가 난다.

조직이 부드럽고 수분이 많아 향이 맑다.

나는 그 향을 몹시 좋아해서, 건강하실 때 어머니가 봄쑥을 보내주시면 쑥국을 끓여 먹곤 했다.

겨울을 지나 막 세상 구경을 하겠다는 녀석들을 밑동에 칼을 밀어 넣고 톡 끊어 사람입에 넣는 것이 쑥으로서는 억울하기도 할 터였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먹히니.

쑥은 단군신화에서 곰을 사람으로 만들 만큼 몸에 좋다고 했다.

어르신도 이유는 몰라도 쑥이 좋다는 건 알고 있어서,

휠체어에 앉은 채 쑥자루를 품고선 몸에 좋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봄쑥이야 향과 영양이 풍부해 약쑥으로 여겨지지만,

겨울을 앞둔 가을쑥을 사는 어르신의 속내를 헤아리긴 쉽지 않았다.

돈이 바닥났다며 아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 용돈을 받은 참이라,

견물생심이 일어나 하지 않아도 될 소비를 부추긴 듯했다.

쑥은 센 줄기에서 잎을 뜯어내는 것 외에는 별로 다듬을 것도 버릴 것도 없었다.

7킬로 가까운 쑥을 네 번에 걸쳐 곰솥에 넣고 데쳐냈다.

흙먼지가 없다고 했지만, 헹구다 보니 씻어도 씻어도 함지박 밑에 모래가 깔렸다.

서너 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너무 헹구다 보니 쑥이 너덜너덜해진 느낌이었다.

어르신은 헹군 쑥을 짜서 비닐봉지 네 개에 나누어 담았다.

아직 냉동실에 쑥버무리가 남아 있어 그걸 다 먹고

내년 봄쯤 떡을 해 먹을 거라며 냉동실에 얼려두겠다고 했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럴 거면 봄쑥을 삶아 드시지, 왜 이 가울에 굳이 쑥을 삶아 냉동실에 넣는 걸까.

세 대의 냉장고의 냉동실은 이미 식재료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자리 잡고 있던 물건들을 꺼내 버리고, 그 자리에 삶은 쑥을 채워 넣었다.

당장 먹지도 않을 쑥을 사다가 냉동시켜 봄에나 쓰겠다고 하는 어르신을 보며,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곧 우리 집 냉장고가 떠올랐다.

그 안에는 언젠가 먹겠다고 사두었던 식재료,

그러나 잊은 채 유통기한을 넘긴 음식들이 있었다.

어르신의 냉동실과 우리 집 냉동실도 따지고 보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요즘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저장’에 집착한다.

한때는 모자라서였고, 지금은 넘쳐서다.

언젠가 쓸 것 같아 사두고, 필요할 때 꺼내보지도 못한 채 버리면서도 또 채운다.

어르신의 쑥은 그저 쑥이 아니었다.

버려질 줄 알면서도 사두는, 우리 모두의 습관이었다.

사람들은 모자랄 걸 미리 걱정한다.

그래서 쌓고, 채우고, 버리면서도 또 산다.

어르신의 쑥은 가을의 쑥이었지만,

그 속에는 계절을 넘어선 불안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쑥은 계절마다 달라도

사람의 마음은 늘 같다.

모자람을 두려워해 채우고, 채운 끝에서 다시 허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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