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서록 57

허물어짐의 기술

by 인상파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


허물어짐의 기술


요즘 부쩍 늙음과 죽음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 문득 내게 허락된 시간이 예정보다 빨리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펼치며 독서록을 쓰다 보면 살면서 몇 번씩 읽었던 책들을 이제는 다시 집어들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펼치면, 그냥 흘러보낼 수 없는 문장들이 나를 붙잡는다.


중증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나로서 나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조차 생각에 그치고 말 수 있음을 느낀다. 어머니의 치매가 어느 날 나에게도 문을 두드린다면, 그 문을 걸어 잠글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대로 당할 수밖에. 죽음의 때는 연장되겠지만, 그건 더 이상 ‘삶’이 아니라 단지 목숨의 지속일 것이다. 그때 인간적인 존엄이니, 의미 있는 노년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부질없는 공허로 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버려지지 못한 존재로, 어디에도 쉽게 치울 수 없는 짐이 되어 남을지도 모른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제목부터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그리고 책장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온 문장은 더욱 마음을 젖게 했다. “이제야 깨닫는다, 이 생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 버리는지를.”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무사 카르나의 한 대목이다. 이어지는 인용은 필립 라킨의 시 〈앰뷸런스〉에서 가져왔다. “결국 그들의 방문을 받지 않은 거리는 없다.” 가완디는 이 두 문장을 책의 서두에 배치하여, 노화와 죽음이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여정을 향해 독자의 손을 단단히 잡아끈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통해 농경사회에서 노인과 죽음을 바라보던 시선과 현대 사회에서 ‘병원에서의 죽음’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대체해 버렸는지를 보여준다. 죽음을 멀리 두고 살아온 우리의 시대가 이제는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이 책은 차분하면서도 냉정하게 일깨워준다. 그는 말한다. “의학은 생명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 삶의 마지막은 점점 더 비인간적으로 변했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노화는 병이 아니라 자연의 언어이며, 죽음은 의학의 실패가 아니라 삶의 완성이라는 것을. 가완디는 “모든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마련이다”라고 썼다. 결국 허물어져 죽음에 닿을 것이다. 그 문장을 오래 붙들었다. 어머니의 몸도, 나의 몸도, 세상의 모든 생명도 결국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그 허물어짐을 막으려 발버둥칠수록 오히려 삶의 품위는 더 멀어지는 듯하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답게 사는 것이다.” 끝까지 자신답게? 병이든 노화든, 그 허물어짐 속에서도 나로서 살아 있으려는 마음, 그것이 바로 인간의 마지막 기술이 아닐까 싶다. 허물어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안에서 여전히 사랑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허물어짐의 기술’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내가 책 속 환자들로서 몇 생을 살다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 왔다. 우리의 의료 현실이 미국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는 불안도 컸다. 예전처럼 여러 자식 중 한 명에게 병든 몸을 의탁할 수도 없고, 사람의 또 다른 피부라 부를 만한 집에서의 죽음은 이제 거의 요원한 꿈이 되어버렸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한 현실 앞에서 그 무력감은 더 깊어졌다.


게다가 죽음을 앞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판단하지 못한 채 가부장적인 의사의 권위와 단순한 정보전달자로서의 말에 의지하게 되는 순간, 그 사이에서 환자는 점점 더 생명 연장 도구로 전락해 갔다. 그 처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도록 내몰고, 죽음은 더욱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럼에도 가완디가 자신의 아버지 병이 암으로 판명되자 그가 의사에서 환자의 보호자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보인 내면의 갈등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는 환자나 가족이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고, 끝내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갠지스강에 일부 유해를 흩뿌리며 오랜 역사의 일부로 그와 세상과의 연결을 느낀다. 그 장면은 슬픔을 넘어선, 평온의 감정에 가까웠다.


고통 없이 잘 죽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최대한 연장하고,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마지막을 맞이하게 만드는 것이 병원의 의술이라는 점에서 정말,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 마음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머지않아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하는 시점이 올 텐데, 그 일 또한 다시 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자인 나의 처지보다 어머니의 일상이—비록 더딜지라도—계속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죽음을 앞두는 상황이라면, 편안하고 익숙한 집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제한된 규율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써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의 마지막 욕구일 것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감옥 같은 시설이나 성급한 제도, 최신 장비가 아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삶을 끝까지,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맞이해야 할 마지막 과제라 여겨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다. 우리가 이미 알아버린 진실을 토대로 행동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는 ‘내려놓을 줄 아는 힘’뿐 아니라,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힘’도 포함한다. 그것은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두 존재 모두가 배워야 할 마지막 과제다.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가완디가 말한 ‘좋은 죽음’이 아닌, ‘좋은 삶의 마지막 장’이며 우리가 품어야 할 가장 인간적인 용기일 것이다.


오늘도 어머니 곁에서 그 기술을 연습하는 중이다. 어머니는 나의 거울이다. 어머니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잃어가지만, 그 옆을 지키며 나는 조금 더 깊이 배우고 있다.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어떻게 사라질 것인가.

그리고 그 모든 허물어짐 속에서도 어떻게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그 질문들이 나를 흔들고, 내일의 나를 붙잡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유글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