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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독서록

화양연화,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by 인상파

채광석의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사무사책방)


화양연화,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살아오다 보니 어찌 어찌 두 권의 책을 냈고, 또 어찌 어찌하다 보니 남편과 나란히 이름을 올려 추천글을 쓰게 된 책도 생겼다. 그 책은 198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채광석 시인의 옥중 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이다. 이 책은 본래 형성사에서 출간되었으나 오래 절판 상태였다가, 2021년 사무사책방에서 40여 년 만에 다시 복간되었다. 그 복간본에 남편과 나의 추천글이 실린 것이다.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바로 그 책’이라는 띠지의 문구는 책이 지닌 존재감을 증명한다. 그러나 채광석 시인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출판사 설명에 따르면 그는 1970~1980년대 진보적 문학 평론계의 한 축을 이루었던 대표적 이론가였고, 1987년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오랜 시간 양평 팔당공원묘지에 머물러 있다가 2020년 8월 6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1971년 강제 징집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복학한 이듬해인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서울대에서 열린 항의 집회의 주모자로 체포된 그는 2년 1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 형벌의 시간 동안 창살 밖에서 그를 온전히 기다리던 여인이 있었다. 둘은 반달할아버지로 유명한 동요 작가 윤극영 선생을 중심으로 모인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사랑하는 연인 강정숙과 나누었던 수백 통의 편지는 한 권의 책이 되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책 제목인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는 마지막 장에 실린 시에서 따온 것이다. 그 시는 한 편의 생애고백처럼 절절하다.


“이승에서 그대를 만나 남다른 기쁨을 맛본/ 그 이유만으로 저승길에서 고통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기죽지 않는다/ 천년왕국이니 영생의 낙원이니/ 내세는 휘황한 행복뿐이라지만/ 그대에게 못다 한 사랑이 허물이 되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한들/ 그게 어찌 나를 미혹할 수가 있단 말이냐/ 삶은 언제나 구비쳐 휘도는 물길/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삶은 구비치며 그대의 심장에 나의 심장을 잇대어/ 출렁거리는 물길로 이어왔느니/ 살지라!/ 삶은 고뇌요 일상은 부대껴 권태의 늪을 이뤄갈지라도/ 살아서 즐거움과 괴로움 함께 마시며/ 사랑하는 작은 몸부림 속에 함께 피로 흐르라/ 맥을 거쳐 다시 맥으로/ 심장을 나와 다시 심장으로/ 펄 펄 펄 솟구치는 피가 되어 흐르다가/ 어느 한순간 삶을 거두고/ 미래의 문턱에 선다 한들/ 천·지(天·地)의 저울대가 무슨 그리 대수로운 논의거리일 것인가/ 행여 윤회의 긴 회로에서/ 남자와 여자로 다시 만나지 못하고/ 이름 모를 짐승으로 마주 으르렁 되게/ 작정되었다 하더라도/ 사랑할지라!/ 사랑에서 사랑으로/ 펄 펄 펄 타오르며 우리가 배운 삶의 생명은/ 사랑,/ 사랑은 우리가 지상에 남길/ 유일한 발자취거니/ 평안하라! 두해의 동고여/ 평안하라”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며, 어떤 사후의 심판도 운명도 넘어서는 힘이라는 사실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그의 문장은 짧다. 솔직하다. 투박할 만큼 단호하다. 그럼에도 말로 다하지 못한 삶의 무게—고문, 투쟁, 불안, 그리움—가 모든 행마다 스며 있다.


그는 그대를 만나 누렸던 기쁨 한 조각만으로도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랑 한 번 제대로 했다는 사실이 한 인간의 존재를 끝까지 떠받쳐주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이보다 명확히 드러낸 문장이 있을까. 종교의 구원도, 사후의 심판도, 다음 생의 운명도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모두 내려놓는다. 사랑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낸 사람에게 고통은 더 이상 삶의 결론이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사람에게 사랑이란 이렇게까지 근원적인 것인가?’를 먼저 떠올렸다. 채광석에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생명이다. 두 심장이 서로의 맥을 타고 이어지는 물길이라 그는 썼다. 삶의 어느 굽이에서 만나 한동안 같이 흔들리며 흘러온 두 사람, 그 생의 떨림이 문장 전체를 진동시킨다.


그는 연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한다. “살지라.” 고통이 와도, 권태가 밀려와도, 인생의 어느 늪에 잠시 빠지더라도, 살아서 서로에게 피가 닿듯 이어져 있으라고. 그 말이 왜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가. 그는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임을 믿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그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평안하라, 두 해의 동고여.” 그 두 해는 단지 감옥의 시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의 젊음, 사랑, 그 절절한 기다림과 간절함까지 포함한 시간이었다. 연서를 오가는 두 해 동안이 그들에게는 ‘화양연화(花樣年華)’와 다를 바 없었으리라. 어떤 시절은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젊은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두 연인이 감옥을 사이에 두고 편지를 나누며 서로에게 가장 깊이 닿아 있었던 시간, 그 순수함과 절실함은 분명 그들의 화양연화였을 것이다.


남편이 떠나고 난 뒤 나는 이 책을 자주 손에 들었다. 심정적으로 순전히 그를 내 곁에 붙잡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남편은 이 책을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 밴 연애편지”라 말하며, 수천 권의 장서 가운데 하나만 고르라면 주저 없이 이 책을 택하겠다고 적어두었다. 그러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이 책을 더 간절히 붙잡게 만들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경향신문 ‘오늘의사색’에 책 감상평을 연재하며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채 시인의 사랑은 “언제나 슬픔과 증오의 장막을 찢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는 “한 사람을 사랑의 상대자로 택할 때 나는 이미 그의 어둡고 불안정한 면까지도 믿고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고통 속에서 단단해진 사랑만이 빛을 발하는 법이다. 사랑 그 자체는 목숨과 다르지 않으니, 살아 있는 동안 두려움 없이 ‘사랑할지라.’


사랑, 인생에서 사랑 없는 삶은 빛을 잃은 등불처럼 방향을 잃고, 뿌리 뽑힌 나무처럼 근원을 잊어버린 것과도 같다. 사랑은 때로 고통의 형국으로, 때로 침묵의 옷을 뒤집어쓰고 오지만 그것을 견딘 자만이 삶의 깊이를 안다. 채 시인의 옥중 글이 지금 우리의 마음을 여전히 흔드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형식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붙드는 기둥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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