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점퍼를 입은 아이
새빨간 점퍼를 입은 아이
어머니를 센터에 모셔드리려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새빨간 점퍼를 입은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내게로 달려왔다. 마침 센터 직원과 함께 어머니를 차에 오르게 하던 참이었다. 아이는 자기가 허리가 아파봐서 아는데, 할머니도 많이 아프실 거라며 자기가 도와드리겠다고 나섰다. 그러더니 어머니의 엉덩이 쪽을 조심스레 밀어 차 안으로 올려드렸다.
어이없고 우습기도 했지만, 그런 아이를 요즘 보기란 참 드문 일이라 그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게 두고 한발 물러섰다. 아이는 할머니가 무사히 차에 오르자 자기도 병원에 가야 하는데 학교에 가고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며 한참이나 뭉기적거렸다. 아이 덕에 나와 센터 직원은 아침부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스스로 나서서 하는 그 아이가 대견스럽기도 했고, 어른을 공경하고 불편한 사람을 돕는 마음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실천하는 모습이 참 기특했다. 가끔 마주쳤던 아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그 아이가 떠나고, 어머니를 실은 차가 떠난 뒤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아이의 깜찍하고 다정한 행동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환하게 만들 줄이야.
어머니를 센터에 보내드린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백 가구가 넘는 우리 동 사람들은 이제 거의 다 나와 어머니를 알고 있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휠체어를 타고 센터에 가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늙은 부모를 떠올린다. 장을 보고 오다가 과일을 내놓기도 하고, 주말농장이나 시골에서 올라온 먹거리를 어머니 드시게 하라며 선뜻 나눠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당신들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요양원에 계신 분도 있고,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다. 그들의 말끝에는 후회와 그리움, 그리고 약간의 죄책감이 배어 있다. 그러곤 나를 걱정한다. “어른 모시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얼마나 힘드세요?” 그 말이 인사치레일 수도 있고,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일 수도 있다.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부모를 떠올리며 마음속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의 마음은 계산이 없고, 꾸밈도 없다. 그 마음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불순하게 느껴질 만큼 순수하다. 오늘 만난 초등학생도 그랬고, 전에도 그런 아이가 있었다. 센터에서 돌아오던 어느 날,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윗집 중학생 여자아이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머니, 힘드시겠어요.”
그 말이 꼭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공부하는 네가 더 힘들지.”
“아니에요. 저는 괜찮은데 아주머니가 정말 힘들어 보여요.”
나는 그저 웃으며
“지금이 제일 좋은 때야.” 하고 말했지만,
그 아이의 말은 오래 남았다. 어른들의 인사치레보다 훨씬 따뜻하고, 내가 힘들고 힘들지 않음을 넘어 스스로를 의미 있는 존재로 여기게 했다.
어른과 아이가 건네는 말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른들의 말에는 경험이 깃들어 있지만 동시에 계산도 배어 있다. 그들은 말의 무게를 알고, 그 무게에 눌리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둔다. 반면 아이들의 말에는 아직 세상의 규범이 덜 스며 있다. 그래서 그 말이 오히려 묵직하다. 꾸밈도, 의무감도 없이 그저 눈앞의 사람을 향해 건네는 순전한 마음. 그 마음이 닿는 순간, 서로에게 왜 말을 건네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말이란 마음의 가장 단순한 몸짓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그 아이가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든 것도 바로 그 순수한 몸짓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요즘 그런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남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도록 길러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경쟁이 현실이라 말하고, 아이들은 그 말을 따른다. 그래서 남을 돕는 일보다 뒤처지지 않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어릴 적부터 ‘착한 마음’보다 ‘유능한 태도’를 먼저 배우게 된 아이들 속에서 오늘 아침의 그 아이는 참 귀하고 반가운 존재였다. 그 아이의 말과 손길은 오래 남을 것이다. 그건 단지 한 노인을 도운 행동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스스로 다가갈 줄 아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잃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노인 공경이나 어른 존중 같은 말보다, ‘어른을 조심하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나쁜 어른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점점 경계해야 할 곳이 되어가고, 따뜻한 마음을 건네는 일조차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 아이의 손길이 더욱 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직 그런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걸 경험하고 나니 그것만으로도 하루치 행복을 다 얻은 듯했다.
어머니를 태운 차가 떠난 뒤, 지하주차장의 공기가 이상하리만큼 투명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선한 마음이 공기 속에 섞이면 세상은 잠시나마 산뜻해진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말하지만, 다시 사람의 선함을 믿고 싶어졌다. 아이는 이미 학교로 향했을 테지만, 아이의 새빨간 점퍼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