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식의 낙화법
이형기의 〈낙화〉
내 식의 낙화법
떨어지는 꽃을 보고 이별을 떠올리는 일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사랑은 왔다가 떠난다. 이 오래된 자연의 순환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며, 낙화를 이별의 은유로 읽는 일 역시 특별할 건 없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듯, 이별 또한 다음 계절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형기의 〈낙화〉는 이 익숙한 장면을 전혀 다른 결로 만든다. 가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단호하고 냉정한 것이 참으로 도회지적이다. 막아서고 매달리고 눈물 짜고 하는 전통적 정서와 달리, 이 시의 이별은 정확한 순간에 스스로 물러나는 사람의 절제를 미덕으로 내세운다. 소위 ‘깔끔한 이별’의 미학이라고 부를 만하다.
전통의 이별은 오매불망(寤寐不忘)하고, 때로는 애이불비(哀而不悲)할 만큼 깊고 절절했다. 〈가시리〉에서 붙잡고 싶으나 붙잡지 못하는 서러움, 계랑의 〈이화우 흩뿌릴 제〉에서 “저도 날 생각하는가”를 묻는 불안,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울음을 삼키는 체념의 깊이까지, 사랑과 이별은 감정의 진폭 속에서 좀처럼 단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낙화〉의 이별은 감정의 잔재를 모두 지워버린다. 섬세한 손길을 한 번 흔드는 것으로 모든 관계가 정리된다. 질질 끄는 감정은 들어설 자리가 없고, 꽃잎이 산뜻하게 내려앉는 장면만이 남는다. 시 속 사랑은 뒤엉키지 않고, 울리지 않고, 붙잡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차갑고 절제된 결은 전통 정서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래서 인구에 회자된 시의 한 구절, “가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 오히려 냉정하게 보이고, 내게는 한층 더 정서적 거리감을 준다.
사랑이 현실에서 이렇게 깔끔하게 끝나는 일은 드물지 않을까. 나는 꽃보다 잎에 가까운 사람이다. 잎은 계절 내내 버티고, 바람에 흔들리고, 마침내 더는 머물 힘이 없을 때 비로소 바스러지며 떨어진다. 오래 붙잡고 놓아줬다가 다시 붙잡는, 겨울 가지에 매달린 잎처럼 처량하고 서툴고 미련스러운 구석이 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그대로 이별에도 반영된다.
나는 정확한 시점에 돌아설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을 보내는 일에 서툴러, 이별하지 못한 마음을 안고 지루할 만큼 길고 느리게 이별을 맞는다. 그런 나의 낙화법이 싫을 만도 한데, 또 그렇게 싫지만도 않다. 이별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그 고통스러워하는 나 자신을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할 때도 대상을 사랑하기보다,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곤 한다. 그런 까닭에 시적 화자의 낙화가 그리 부럽지는 않다.
꽃마다 지는 방식이 제각각이듯, 나 역시 나에게 맞는 속도와 모양으로 지고 싶다. 서툴고 느리면 느린 대로, 놓지 못하는 마음을 움켜잡고 한동안 흔들리다 겨우 내려앉더라도, 그 또한 내가 지나온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이 바로 내 식의 낙화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