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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82

땅과 기억, 그리고 봄의 상실에 대하여

by 인상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땅과 기억, 그리고 봄의 상실에 대하여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무엇보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남아있다. 흙을 이렇게 감각적으로, 몸의 온기와 촉감으로 묘사한 시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사춘기 소녀였다. 발바닥으로 밭고랑을 뛰어다니던 소녀에게 이 시로 인해 흙은 갑자기 몸처럼 뜨겁고 부드러운 존재로 다가왔다. 그 감각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불러왔고, 동시에 가슴을 살짝 설레게 하기도 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흙조차, 들판조차, 계절조차 이렇게 살아 있는 감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게 느껴졌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흙의 냄새로 계절을 읽고, 들판의 표정으로 날씨를 짐작하며 나는 자랐다. 겨울이 물러나면 해토가 시작되어 흙은 푸석해지고, 도랑의 얼음은 천천히 풀렸다. 시에 나오는 종다리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 참새와 크게 다르지 않으려니 짐작하며 하늘을 오가는 새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제비가 처마 밑으로 돌아오면 아, 진짜 봄이 왔구나, 그렇게 계절을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봄은 누구에게나 열리는 문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힘겨워도 봄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는 계절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상화의 시는 그 믿음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봄은 왔지만, 그 봄을 맞이할 권리는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절규. “지금은 남의 땅”이라는 말,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고백은 사실 이미 봄을 빼앗긴 상태를 말하고 있다. 봄이 왔는데도 기쁘지 않은 이유, 온통 초록 생기로 가득한 들판이 도리어 가슴을 후벼 파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신이 일구던 땅, 조상의 피땀이 스며든 땅이 더 이상 ‘나의 땅’이 아니게 되었을 때 봄의 기쁨은 한순간에 울분과 설움으로 뒤바뀐다. 농부에게 땅은 삶이었고, 존엄이었으며, 생계 그 자체였다. 땅이 없다면 씨를 뿌릴 수도, 수확할 수도, 미래를 그릴 수도 없었다. 땅의 상실은 곧 삶의 상실이었다.


이 시를 읽을 때면 어쩔 수 없이 만주와 북간도로 이어지던 유랑민들의 행렬이 떠오른다. 땅을 잃고, 집을 잃고, 결국 봄을 맞을 자리마저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이 걸어가던 눈보라 속 길은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의 길이라기보다, 어쩌면 봄이 더 이상 오지 않는 삶을 그저 견디기 위해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김소월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이상화의 시가 격정적이고 직접적인 현실 인식 속에서 땅의 상실을 고발한다면, 김소월의 이 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한(恨)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안에 분명한 현실 참여적 인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소월이 말한 ‘보습 대일 땅’은 단순한 토지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일구고, 몸을 기대고, 세대가 이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터전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 땅 한 뙈기조차 허락되지 않은 현실 앞에서, 소월의 시는 땅을 잃은 민중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절규에 가깝다.


고향을 떠나 유랑하던 그들의 발걸음 뒤에는 언제나 고향의 들판이 있었을 것이다. 종다리가 울고, 도랑물이 흐르고, 나비가 맴돌고, 제비가 다시 돌아오는, 그들이 다시는 밟지 못할 봄의 들판. 봄은 왔지만 그 봄은 더 이상 그들의 봄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시에는 푸른 웃음과 푸른 설움이 뒤섞인 비애, 봄의 생명력으로 웃고 있는 자연 한가운데에서 땅을 빼앗긴 인간의 설움이 분리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기묘한 절뚝임이 남아 있다.


봄은 왔다. 그러나 그 봄을 맞이할 땅을 잃어버린 사람은 결국 봄까지 잃어버린 셈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계절이 바뀌어 봄바람이 불어와 들판을 스칠 때마다 그 봄을 끝내 맞지 못한 사람들의 설움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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