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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84

파괴의 몸짓과 선언의 한계

by 인상파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파괴의 몸짓과 선언의 한계


근대시의 장을 여는 작품으로 배워 왔지만, 오히려 가장 시답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작품이 바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아닌가 싶다. 어찌 보면 동시처럼 읽히고, 실제로 동시로 본다면 아주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 철썩이고 부수며 달려 나가는 리듬은 어린이의 활달함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 활달함은 시가 감당해야 할 정서의 깊이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기존의 시틀을 깨고 있으니 새롭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새롭다’는 뜻의 신체시라는 이름과 달리, 이 시에는 정작 새롭게 도달한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 형식은 달라졌으되, 시적 완성도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한 인상을 준다.


제목부터 어색하다. ‘에게서’와 ‘에게’라는 조사는 무엇인가가 이동하고 있음을 암시하지만, 정작 무엇이 해에게서 소년에게 옮겨지는지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 그 실체가 밝혀질 듯하지만, 작품을 따라가 보아도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전달은 없다. 오히려 이 ‘에게서’는 당시의 문법 체계 속에서 주격 조사처럼 기능하고 있으며, 제목은 ‘해가 소년에게’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무엇이 전달되는가보다 누가 말하는가가 앞에 놓인 제목인 셈이다.


이렇게 읽고 들어가면, 이 시에서 오가는 것은 사유나 감정이 아니라 힘의 과시와 그에 대한 수용을 요구하는 태도임이 분명해진다. 바다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끊임없이 증명하고, 소년은 그 힘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위치에 놓인다. 제목이 만들어낸 ‘이동’의 기대는 배반되고, 남는 것은 내용의 전달이 아니라 확신에 찬 목소리 자체다. 그래서 이 시가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선언이다.


이 시의 ‘해’는 태양이 아니라 바다다. 철썩이고, 때리고, 부수고, 무너뜨리는 반복적 동사들은 바다의 압도적인 힘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거침은 장엄하기보다, 어딘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의 힘자랑처럼 들린다. 확신에 찬 목소리에는 거만함까지 엿보이지만, 정작 그 확신이 어떤 세계를 통과해 얻어진 것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더 어색한 지점은 바다가 뭇사람들에게는 호령하면서도 유독 소년에게만 호의를 보인다는 점이다. 바다는 담 크고 순정한 소년을 자신의 짝으로 지목하고, 위협 대신 보호를 약속한다. 품에 안아 주고 입맞춤하듯 이끌겠다는 태도는 위엄보다는 과잉된 친절에 가깝다. 이 관계는 사유의 교환이 아니라, 따르기를 전제한 가르침, 다시 말해 일방적 호출로 굳어진다.


이 시가 속한 신체시는 ‘새로운 몸의 시’, 곧 기존 형식과의 결별을 전제로 한 시를 뜻한다. 기존을 벗어나기 위해 과거를 부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시에 반복되는 “때리고, 부수고, 무너뜨린다”는 표현은 자연 묘사를 넘어 기존 시적 전통을 향한 상징적 파괴의 몸짓으로 읽힌다.


그러나 문제는 파괴의 방향이다. 이 시가 밀어내는 것은 낡은 형식만이 아니라, 그 형식 안에 축적되어 있던 정서의 깊이까지 포함한다는 점이다. 황조가에서 시작해 향가와 고려가요로 이어진 고대 시가에는, 엄격한 형식 속에서도 상실과 그리움, 망설임이 응축된 서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반면 이 시에서 감정은 숙성되지 않은 채 곧장 확신의 언어로 분출된다. 형식은 앞서 나갔지만, 정서는 그만큼 따라오지 못한 셈이다.


이 정서적 공백은 이 시가 일본에서 먼저 성립된 신체시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일본에서 서구 근대시를 번역·실험하며 형성된 신체시는 과도기의 산물이었고, 조선은 그 가공된 형식을 다시 수용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 결과 이 시는 서구 근대시가 지닌 내면의 균열과 자기 성찰을 직접 통과하지 못한 채, 형식의 외피와 선언의 어조를 앞세운 목소리로 남게 된다. 새로워 보이지만, 정서의 성숙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오히려 기존 시가보다 퇴보한 인상을 주는 이유다.


이 시가 남긴 것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태도이며, 흔들림 끝에 얻은 힘이 아니라 아직 흔들린 적 없는 자신감이다. 그래서 이 시는 근대의 시라기보다, 근대를 앞세운 선언문에 가깝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형식이라는 이 작품이 정작 보여주는 것은 세계를 새롭게 인식한 감각이 아니라, 세계 앞에서 아직 시험받지 않은 태도다. 새로움은 말해졌으되, 살아지지는 않았다. 이 시는 근대의 문턱에 서 있으나, 끝내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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