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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85

고양이가 시를 물어왔다

by 인상파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


고양이가 시를 물어왔다


봄을 고양이라고 하는, 이 시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당혹스러웠다. 봄이라면 꽃이나 바람, 새싹과 햇살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봄이 고양이라니. 고양이는 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 우리 동네는 집집마다 개를 키웠지,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없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가까이서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고양이는 사람만 봤다 하면 도망쳤으니까. 지금이야 고양이를 키우고 있고, 아파트 단지에서 길고양이를 날마다 마주치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에 대한 기억은 실제보다 이야기로 먼저 다가왔다. 검은 고양이는 사악하다느니, 고양이가 원한을 품으면 그 집에 뱀이나 쥐를 물어다 놓는다느니 하는 말들. 확인할 길 없는 소문들이 어린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고양이는 친근한 생명이라기보다 어둠과 연결된 존재였다.


그런 고양이였기에 ‘봄은 고양이로다’라는 시를 마주했을 때, 봄은 무척 낯설게 다가왔다. 봄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고양이를 불러온 이유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되면서, 비로소 이 시에 가 닿을 수 있었다.


시 속에서 봄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고양이의 몸을 따라 부드러움과 나른함, 갑작스러운 긴장과 생기의 흔적만이 지나간다. 꽃가루처럼 부드러운 털, 호동그란 눈에 흐른다는 미친 봄의 불길, 고요히 다문 입술에 떠도는 졸음, 수염 끝에까지 번지는 푸른 생기.


고양이를 키우면서 털과 눈과 입술과 수염을 찬찬히 살핀다. 달아나려는 놈의 털을 쓰다듬으며 시인이 말한 봄의 향기와 불길, 졸음과 생기를 떠올린다. 눈가에 붙은 눈꼽은 앙 다문 입술과 쌍으로 졸음을 부채질한다. 졸다가도 깨어나 제 털을 열심히 핥는데 털의 부드러움은 그 혓바닥에서 나오는 것 같다. 고요히 다문 입술에는 나른한 시간이 머물다 간 흔적도 보인다.


고양이와 눈싸움이라도 벌이듯 눈빛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문득 눈에 불이 붙는 것 같다.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른다는 것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깨어나는 생의 순간, 그 짧고도 선명한 번뜩임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늘 뻗어 있는 수염에서는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고 있는 것 같다. 왜 시인은 코와 귀에 도는 봄의 기척은 노래하지 않았을까. 고양이의 귀와 콧잔등에서는 어떤 봄의 기척이 감돌고 있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봄은 그렇게 향기와 온기로 깨어났다 다시 졸며 한 생명의 리듬으로 오간다. 말없이 다가왔다가 붙잡으려 하면 이미 다른 자리에 가있는 것이다.


이 시는 봄을 고양이라고 말해놓고 정작 봄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고양이를 오래 바라보게 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고양이에게서 봄의 기운을 느끼고 있다.


이 시를 읽고 나서 봄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봄은 물오른 나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며 감각으로 익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가 있었고, 고양이를 가까이서 알지 못하던 시간이 있었고, 그다음으로 고양이가 우리 집에 왔다. 그 이후로 우리 집에서 봄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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