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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86

그립다는 말을 할까 말까

by 인상파

김소월의 〈가는 길〉


그립다는 말을 할까 말까


김소월의 〈가는 길〉은 ‘가는 길’이라는 제목보다, 그립다는 말을 할까 말까 하는 사람의 망설임으로 기억되는 시다. 그립다. 그립다라는 말을 속으로 자꾸 되뇌어 본다. 그립다. 그립다는 말에는 두 겹의 거리가 겹쳐 있다. 하나는 물리적 거리다. 곁에 있지 않다는 사실, 함께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다른 하나는 정서적 거리다. 그리움을 전달해도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예감, 혹은 이미 같은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감각에서 생기는 거리다. 이 두 거리가 포개질 때, 그립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늦고, 이별보다 오래 남는다.


그립다는 말이 이토록 깊은 맛을 갖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현재의 선언이라면, 그립다는 말은 이미 거리가 생겼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거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감정이다. 물리적 거리와 정서적 거리가 포개질 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마음 안쪽에서만 울린다. 그래서 이 시는 감정을 토해내지 않는다. 감정을 데리고 흐른다.

어쩌면 그렇기에 시적 화자는 그립다는 말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며 끝내 내뱉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립다, 그 말은 고백도 선언도 되지 못한 채 둥둥 마음을 울리는 말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립다는 말을 선택했으면서도, 말하는 순간 그 두 겹의 거리가 하나의 결론으로 굳어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적 화자의 망설임은 미련이라기보다 감정의 보존에 가깝다. 말해지는 순간 감정은 전달되고, 전달되는 순간 감정은 정리된다. 화자는 그 정리를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떠나야 하는 상황임은 분명한데, 그립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이 시는 단호한 결단이 아니라 지체와 유예로 이루어진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까닭이다.

이 시에서 상대의 마음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떠나야 할 이유도, 이별의 합의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상대는 ‘나’라는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공백은 떠남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혼자만 감당해야 하는 이별, 혼자만 알고 있는 마음. 그래서 자연이 개입한다. 까마귀는 해가 진다고 울고, 강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연달아 흐른다. 이는 화자의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기보다, 주저를 재촉하는 시간의 목소리다. 머물고 싶은 마음과 떠나야 하는 시간의 흐름이 서로 어긋난 채 동시에 작동한다.


이렇게 읽고 나면 문득 〈초혼〉이 떠오른다.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말을 쏟아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한마디는 끝내 닿지 못한 채 허공에 남아 있던 시. 그 시에서 화자가 끝내 하지 못한 심중의 말은, 어쩌면 ‘그립다’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너무 늦게 도착했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확정되어 버릴 것 같아 삼켜야 했던 그 한마디. 그렇게 말해지지 않은 그립다는 감정이, 이 시에서는 입안에 맴돌다가 다시 마음속으로 되돌아간다. 김소월의 시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말해지지 않은 한마디가 오히려 가장 오래 살아남아 우리를 붙든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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