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자리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
기다림의 자리
나룻배와 행인. 이미 역할은 고정돼 있다. 이 관계에서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한 번 놓이고 나면 바꿀 수가 없다. 행인은 건너가야 하는 사람이고, 나룻배는 건네주어야 하는 존재다. 그것은 합의의 결과라기보다 처음부터 그렇게 던져진 관계에 가깝다. 그래서 이 시에는 시작부터 답답함이 깔려 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남녀의 고정된 관계로 이해했다. 떠나는 남성과 기다리는 여성, 오래도록 반복되어 온 서사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특히 기다리는 여성의 처지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싶었다. 흙발로 짓밟고 강을 건너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존재, 그를 위해 자리를 지키며 닳아가는 존재. 그 불균형이 너무 익숙해서,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시를 자꾸 되뇌다 보니, 그 구도가 남녀의 문제를 넘어서는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행인과 나룻배는 성별의 은유라기보다, 관계에 들어서는 순간 나뉘는 자리 자체를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떠나는 자와 기다리는 자, 목적이 되는 사람과 수단으로 기능하는 존재. 행인에게 나룻배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강을 건넜다면 나룻배는 버려야 한다. 이고 갈 수는 없는 존재다.
불교의 뗏목이 그러하듯, 나룻배는 강을 건너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이 시의 나룻배는 방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침묵하지 않는다.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잊힐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건넨다. 그래서 이 시는 불교적 체념이 아니라, 체념을 감당하는 한 존재의 고통을 끝까지 보여준다.
나룻배의 입장에서 강을 건네주는 일은 곧 목적 그 자체다. 이 지점에서 두 존재 사이의 거리는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다. 목적과 수단의 거리, 그 간극은 천양지차다. 행인은 물만 건너면 나룻배의 존재 자체를 잊는다. 기억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룻배는 그럴 수가 없다. 나룻배에게 행인은 기다림의 이유이고, 오지 않으면 그대로 그 자리에 묶여 낡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이 시의 기다림은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구조이고, 미덕이 아니라 역할이다. 흙발로 짓밟고 떠날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올 거라는 믿음 하나로 기다림을 포기하지 못하는 태도. 그 태도는 희망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깝고, 체념이라기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를 감당하는 방식에 가깝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이라는 인식은 어떤 사연이나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운명적이다. 당신이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을 위해 물을 건넨다. 돌아봄도, 감사도 기대하지 않은 채로. 그저 그렇게 놓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읽다 보면 점점 답답해진다. 기다리는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반드시 나룻배의 자리를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은 나룻배이고, 다른 날에는 행인이 될 수도 있지만, 관계가 성립되고 나면 이 비대칭은 반복된다.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이 시를 숨 막히게 만든다.
〈나룻배와 행인〉은 이 불균형을 해결하지 않는다. 한용운은 나룻배를 구원하지도, 행인을 꾸짖지도 않는다. 다만 나룻배의 시선으로, 그 자리에 놓인 존재가 어떤 태도로 자신을 지켜내는지를 끝까지 보여줄 뿐이다. 그는 삼라만상의 조화 속에서 각자가 맡은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하면서 그 질서를 인간의 도덕이나 감정으로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에는 구원의 약속도, 관계를 뒤집는 반전도 없다. 대신 주어진 자리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어떻게 스스로를 소진시키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만이 남는다. 한용운이 보여주는 조화란 모두가 평등해지는 세계가 아니라, 불균형마저도 세계의 한 부분으로 끌어안고 견뎌내는 태도에 가깝다. 나룻배가 닳아가면서도 제 몫의 시간을 끝내 통과하려는 것 역시, 바로 그 조화 속에 자신을 놓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