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과 주례사
한용운의 「복종」
복종과 주례사
한용운의 「복종」이라는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이라고 밝히고 있듯, 나 역시 시에 등장하는 ‘남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복종보다 자유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호출된 이후, 나는 이 시의 자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원 시절에 결혼을 하게 돼 지도교수님이 주례를 서 주셨다. 그분은 주례사 도중 시 한 편을 낭송하셨는데, 그것이 한용운의 「복종」이었다. 그분이 주례를 서실 때마다 이 시를 고집하신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시 평론가이신 그분이 고루해서, 혹은 익숙한 레퍼토리에 기대어 식장에서 이 시를 낭송했을 리는 없다. 오히려 그분 나름의 판단과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제자가 한 가정을 이루는 순간에, 가장 단정한 언어로 건네고 싶은 당부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복종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순종, 인내와 함께 여성이 지녀야 할 미덕으로 호출되었고, 그 미덕은 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명령의 형태를 띠었다. 선택이라기보다 강요에 가까웠고, 자발성보다는 의무의 언어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오늘날 이 단어는 자연스럽게 거부감을 동반한다.
한편, 복종은 군대 용어로도 널리 쓰였다. 상명하복, 군기, 질서 유지 같은 말들과 함께 움직이며 개인의 판단과 감정을 통제하는 언어로 기능했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군 조직 안에서도 인권과 존엄이 문제되면서 이 단어는 점점 일상 언어에서 밀려났다. 복종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의 결이 더 이상 용인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한용운의 「복종」은 더욱 낯설다. 이 시가 노래하는 복종은 제도나 권력, 위계질서에 대한 복종이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강요되는 명령도 아니고,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 수행도 아니다. 한용운의 복종은 오직 한 존재를 향해 스스로 선택한 태도이며, 그 선택을 끝까지 감당하겠다는 결단에 가깝다.
거기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없다. 위계질서도 없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상대를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기능한다. 복종은 굴복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며, 힘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로 전환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복종은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에 속한다.
그렇기에 결혼의 미덕은 어쩌면 한용운이 노래한 복종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자신을 지우는 굴종이 아니라, 서로를 의심하지 않겠다는 결단에 가깝다. 상대의 선택과 말, 침묵까지도 신뢰하겠다는 태도. 그런 절대적인 믿음을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복종이 일방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라면,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몸을 낮출 수 있는 관계라면, 결혼생활은 적어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를 쉽게 좋아할 수는 없다. 사랑을 복종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어버릴 때, 사랑이 가진 복잡함과 어긋남, 망설임과 침묵 같은 것들이 너무 단정하게 정리되어버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랑은 때로 복종이 아니라 저항이고, 동의가 아니라 유보이며, 끝내 설명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기도 하다. 관계를 오래 유지해온 사람일수록 그 불완전함을 잘 안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그날의 「복종」은 시라기보다 주례의 언어에 가까웠다. 사랑을 아름답게 말하기보다,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건너가야 하는지를 조용히 일러주는 말. 시 평론가인 그분이 굳이 이 시를 반복해서 선택한 데에는, 제자가 한 가정을 이루는 순간에 건네고 싶은 가장 단정한 당부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 시를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중요한 시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분이 결혼식장이라는 자리에서 제자에게 건넨 삶의 당부가 시의 언어로 도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함과는 다른 차원의 기억. 어떤 시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 깊이 각인되어 오래도록 불려 나오는 말로 남는다. 그날의 「복종」이 내게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