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지가 슬픈 짐승
노천명의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冠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 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모가지가 슬픈 짐승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여성 시인을 떠올리면 유독 한 사람의 이름만 떠오른다. 노천명이다. 노천명은 내게 ‘사슴’의 시인이다. 여성 시인에게 어울림직하게 ‘사슴’이라는 제목부터 유난히 곱게 느껴진다. 사슴을 누가 뭐라고 하든, 내게 사슴은 노천명의 사슴 이미지로 남아있다. 다른 동물과는 결이 다른 고귀함을 지닌 존재, 그리고 ‘슬픈 모가지’라는 태생적 조건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말이다.
그런데 사슴은 모가지가 긴 게 어째서 슬픈 것일까. 사슴의 모가지에 시인이 이토록 천착한 것은, 어쩌면 시인 자신 또한 세상 속에서 목이 긴 존재처럼 살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모가지가 긴 게 오히려 짧은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스쳤다. 높이 난 갈매기가 멀리 본다는 말이 있듯, 모가지가 긴 짐승은 다른 동물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으니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시에서 사슴을 슬프게 하는 것은 더 멀리 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더 멀리 본다는 것은 곧 더 먼저 알아차린다는 뜻이고, 더 먼저 안다는 것은 그만큼 먼저 침묵해야 한다는 운명과 맞닿아 있다. 사슴은 위험을 가장 먼저 감지하지만, 그 사실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자리에는 있지 않다. 몸의 구조가 허락한 시야는,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책임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사슴의 모가지는 유리함이 아니라 부담이 되고, 축복처럼 보이는 조건은 곧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이어지는 구절,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는 이런 사슴의 처지를 더욱 분명히 한다. 점잖음은 성품이기 이전에 태도이고, 그 태도는 선택이 아니라 결과다. 긴 모가지는 촐랑대기 어려운 몸을 만들고, 몸의 제약은 행동을 늦추며, 행동의 늦어짐은 침묵으로 굳어진다. 사슴의 말없음은 수양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몸의 숙명에 가깝다.
그래서 시 속의 사슴은 관이 향기로운 존재로 그려진다. 사슴의 뿔은 왕관처럼 머리 위에 얹혀 있지만, 그 고결함은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쉽게 훼손되고 잘려 나갈 수 있는 것, 타인의 욕망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자리다. 사슴이 속했던 높은 족속이라는 말은 신분의 높음이라기보다, 아직 침범당하지 않았던 존재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상태는 결국 외부의 힘에 의해 깨진다.
그리하여 시에 등장하는 잃었던 전설은 자의적으로 포기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외부의 침범으로 인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게 된 자리,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상태의 상실이다. 되돌릴 수 없기에 전설이 되고, 다시 살 수 없기에 향수가 된다.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향수로.
사슴이 들여다보는 것은 물속의 제 얼굴이 아니라 그림자다. 얼굴은 현재의 자신이지만, 그림자는 이미 실체를 잃은 흔적이다. 손을 내밀면 흔들리고 사라지는 것. 사슴은 지금의 자신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현실에서 살 수 없게 된 자기 자신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래서 사슴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싸우지도 않고, 항변하지도 않는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밀려난 존재에게 남은 선택은 많지 않다. 다만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볼 뿐이다. 그 산은 한때 머물렀던 곳이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터전이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자신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상태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확인하게 하는 방향이다.
그래서 사슴은 슬프게도 말없이 점잖고, 먼 산을 응시한다. 사슴의 슬픔은 모가지가 길어서가 아니라, 길다는 조건을 지닌 채 말할 수 없는 자리에 놓였기 때문에 생긴다. 산이자 ‘높은 족속’이던 시절의 자리, 아직 침범당하지 않았던 존재의 상태에서 밀려나 말해도 이해되지 않고 말하면 약점이 되며, 침묵조차 강요되는 세계에 놓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잃고 말할 수 없는 세계에 남겨진 채 살아가야 한다는 데서 그 슬픔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