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12

창으로 난 웃음

by 인상파

김상용의 <南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창으로 난 웃음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오랫동안 애정해 왔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의 삶에 덧붙여진 자극적인 이야기를 접하고 난 뒤부터, 이 시는 내게 잠시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따뜻한 볕과 옥수수의 냄새를 머금고 있던 시가 어느 순간 차갑고 불길한 그림자를 뒤집어쓰는 듯 느껴졌고, 마음은 본능적으로 그의 시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시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의 온도가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소박하고 유유자적한 삶이 그리워질 때면, 나는 다시 이 시를 찾게 된다. 복잡한 말과 설명이 필요 없는 자리, 삶을 굳이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그리워질 때, 김상용의 시가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특히 나는 이 시의 결구인 “왜 사냐건 / 웃지요.”를 그대로 가져와 묻고 답하는 때가 많았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할 말이 없어지거나, 어떤 질문 앞에서 대답이 궁색해질 때, 그 문장은 마치 혼잣말처럼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세상의 질문을 무효화하는 그 대목이 좋았다. 설명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아도 되는 자리, 대답을 거부하는 방식의 대답이라는 점에서 이 시구는 오래도록 나를 지탱해 주었다.


사람들이 던지는 “왜 사느냐”는 질문은 대개 삶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사회의 잣대에 맞게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말이기 십상이다. 직업은 무엇인지, 성취는 있는지, 효율적인지, 의미와 계획은 분명한지 같은 질문들 앞에서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상대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시적 화자는 그러길 거부한다. 논쟁도, 설득도, 항변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웃는다. 그 웃음은 “나는 네가 던지는 질문의 틀 안에서 내 삶을 재단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들린다. 어쩌면 내가 그 문장으로 사람들의 질문을 흘려보냈던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삶, 설명하고 싶지 않은 삶, 말로 붙들리면 부서지고 마는 어떤 마음을 그 시구가 받쳐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결구의 결기를 받아들이며 다시 첫 구 “남으로 창을 내겠소”로 돌아와 음미하게 되면, ‘창’이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꽂힌다. 남향집을 짓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창을 내겠다는 것이다. 창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


집은 몸이 머무는 자리이지만, 창은 세계와 마주하는 방식이다. 남으로 창을 낸다는 말은 삶의 조건을 송두리째 바꾸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머문 채 어디를 향해 바라볼 것인가를 선택하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볕이 가장 오래 머무는 쪽, 식물이 자라고 사람의 온기를 유지하기 쉬운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겠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연 속에서 은거하며 살아가는 은둔이나 도피의 제스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작품 발표 연도가 1934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로도 읽힌다. 그러나 그 거리는 무력한 회피라기보다, 시대의 언어에 포획되지 않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이 시는 ‘창’을 통한 시선의 전환에 대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겠다는 거창한 말 대신, 햇볕이 드는 쪽으로 창을 하나 내겠다는 소박한 몸짓을 앞세운다. 그 창으로 들어오는 볕이 삶의 온도를 바꾸고, 그 온도가 밭을 갈고 김을 매는 하루의 리듬을 만들며, 마침내 강냉이를 나누어 먹는 자리까지 이끈다.


그렇게 보면 첫 구의 ‘창’과 마지막의 ‘웃음’은 서로를 비춘다. 남으로 난 창은 세상을 밝은 쪽에서 보겠다는 선택이고, “왜 사냐건 / 웃지요”는 그 선택을 흔들려는 질문들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태도다. 설명의 언어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기, 말보다 몸과 온도로 살아가겠다는 고집이 이 시의 처음과 끝을 단단히 묶고 있다.


어쩌면 내가 그 문장을 빌려 사람들의 질문을 흘려보냈던 순간들 역시, 집을 버리지 않고도 창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이 시의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세상과 등을 지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잣대에 포획되지 않는 법. 김상용의 시는 남으로 난 창 하나와, 끝내 설명하지 않는 웃음 하나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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