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14

고독한 반원의 가을

by 인상파

김광균의 <秋日抒情>


낙엽은 폴란드 亡命政府의 지폐

砲火에 이즈러진

도룬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러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래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帳幕 저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여간다



고독한 반원의 가을


이 시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감정이 세계를 스쳐 지나간 흔적을 남기는 시다. 가을이면 풍성하던 세계가 헐거워진 느낌이 든다. 낙과와 낙엽의 계절이라서, 그 틈으로 삐걱거리는 마음이 흘러나와 언어가 되지 못한 채 사물에 잠시 닿았다가 궤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아마도 추일서정(秋日抒情)이란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고 부르는 시구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 이질적인 결합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가을의 낙엽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섬세한가. 낙엽을 밟는 소리를 듣는 일, 그 바스락거림 속에서 사색과 회상이 번지는 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가을의 정취다. 그러나 김광균의 가을에는 그런 감상의 여지가 없다. 그의 낙엽은 정취가 아니라, 현실의 표면을 스치는 어떤 불편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시인이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불러온 데에는 분명한 시대적 배경이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40년, 폴란드는 1939년 9월 서쪽에서 나치 독일, 동쪽에서 소련의 침공을 동시에 받으며 이른바 독소 양면 침공을 겪었다. 그 결과 폴란드 정부는 붕괴되었고, 망명정부는 프랑스와 영국 등지로 떠돌게 된다. 즉 1940년의 폴란드는 국가로서 존재하지만, 땅 위에는 없는 나라였다.


국가의 실재를 증명하던 지폐가 종이조각이 된 폴란드의 현실, 그리고 폴란드의 오래된 역사 도시 도룬 시의 ‘포화에 이즈러진 하늘’은 낙엽을 더 이상 단순한 자연물로 보게 두지 않는다. 1940년의 세계에서 낙엽은 평화로운 계절의 장식이 아니라, 국경 없이 흩날리는 존재다. 낙엽은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의미를 잃고, 정착할 자리마저 상실한 상태다. 이 이미지는 같은 해 조선의 정서적 위치를 비추며,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 풍경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실의 시대에 길은 더 이상 목적지를 향해 이어지지 않는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러”진다.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진 길은 사회적 질서와 방향 감각이 함께 이완된 상태를 드러낸다. 더욱이 그 길이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진다는 건 그 빛이 사물을 인도하는 빛이 아니라 과잉으로 쏟아져 대상을 지워버림을 밝힌다. 급행차 역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들판을 달릴 뿐,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시 전체를 관통하는 동작은 떨어지고, 떠나고, 풀어지고, 던져지는 일들이다. 그러나 그 어떤 움직임도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결국 허공에 던져진 돌팔매는 완전한 원을 그리지 못한 채, 고독한 반원을 그리고 잠기어간다. 이 반원은 미완의 궤적이며, 세계와 닿지 못한 의식의 흔적으로 보인다.


이 시에서 감정의 이름으로 직접 불리는 것은 ‘고독’뿐이다. 고독은 감정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다. 떨어지고 떠나고 던져졌으나, 끝내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못한 상태가 남긴 이름이 바로 고독이다. 그것은 개인의 성격에서 비롯된 외로움이 아니라, 시대가 개인에게 허락하지 않은 관계 조건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그래서 〈추일서정〉은 가을의 서정시이면서 동시에, 방향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의식의 풍경을 보여주는 시다. 그것은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라는 구절에서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난다. 이 말은 감정의 토로라기보다, 시대 속에서 생각조차 기댈 곳을 잃어버린 상태에 대한 진술에 가깝다. 버릴 곳 없는 생각은 결국 허공에 던져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완결되지 못한 궤적, 곧 고독한 반원이다.


김광균은 가을 한복판에서 사물들이 남긴 궤적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리고 그 궤적의 끝에, 고독이라는 말 하나만을 남긴다. 그것은 완성되지 못한 반원처럼, 오래도록 우리 마음 어딘가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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