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15

구두를 신겨준 뒤에도 남는 일

by 인상파

김상옥의 〈어느날〉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구두를 신겨준 뒤에도 남는 일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작품 속의 딸을 이제 막 부모의 손을 벗어난 아이라고 여겼다. 구두를 새로 맞춰 신겨주니, 그 아이가 좋아서 혼자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뒷모습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을 상상했다. 거기에는 안도와 뿌듯함, 그리고 조금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을 다 해주었다는 마음, 이제는 스스로 걸어가도 된다는 허락 같은 것이 그 장면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아도 그 장면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새 옷이나 새 신발을 사줄 때의 기쁨을 한 번쯤은 누려보지 않은 부모는 드물 테니 말이다. 구두에 특별한 상징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 모습은 성장의 순간, 독립의 출발처럼 충분히 읽혔다. 그 장면에서 ‘저만치’ 커버린 아이에 대한 부모가 느끼는 세월의 무상과 속절없음도 떠올렸다.


그런데 요즘 성인이 된 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다시 이 시를 보자, 구두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으로 읽히지 않았다. 그 구두는 아이의 발에 맞춘 신발이 아니라, 사회에 나가기 위해 신어야 했던 조건,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 했던 삶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시 속의 딸은 더 이상 부모 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이제 막 독립을 시작하는 아이’가 아니라, 이미 한 번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맞지 않는 구두로 걸어본 성인이 된 딸로 보이기 시작했다.


구두를 신겨준다는 행위는 해준 일의 목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주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신발은 마련해 주었지만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노심초사하며, 넘어질 때의 다친 모습과 마침내 신겨준 구두를 벗어던지는 순간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생애 사무치던 일’은 딸에게 다 해주지 못한 마음, 부모 혼자서만 끝내 정리하지 못한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속에서는 딸이 저만치 가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그렇게 성큼 갔다가 맞지 않은 구두를 신거나 버리고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다 커서 세상의 쓴맛을 보고 돌아온 딸에게 부모는 다시 구두를 맞춰줄 수는 없지만, 벗고 돌아온 발을 외면하지는 못한다. 그 이후의 몫은 조언도, 해결하려는 애씀도 아니고 침묵과 기다림이다.


그래서 ‘한 생애 사무치던 일’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만은 아니다. 지금도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모양을 바꾸며 계속될 일이다. 사무치던 일은 끝난 일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계속 다른 얼굴로 돌아오는 일이다.


어느 날, 그런 일이 일어나겠지. 예고도 없이, 준비할 틈도 없이. 그래서 ‘어느 날’은 하루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처럼 느껴진다. 무언가가 일어난 날이 아니라, 이미 건너와 버렸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 지점.


시의 결구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는 위로라기보다 깨달음에 가깝다. 지금 이 마음도 지금 이 방식으로는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거라는 인식.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붙잡고 있던 마음조차 어느 날 문득 저만치 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딸을 보내는 이야기이면서 부모가 계속 남아 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보냈다고 끝나지 않고, 다 해주었다고 정리되지 않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 구두를 신겨주는 일은 끝났지만, 부모의 생애에서 사무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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