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울음을 지켜본 밤
이용악의 〈달 있는 제사〉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어머니의 울음을 지켜본 밤
어릴 적 큰집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큰집은 늘 북적였다. 특히 할아버지 제사 때가 그랬다. 출가한 고모 내외가 들어서고, 부산에 살던 작은아버지 내외가 오고, 시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시던 작은아버지들 내외까지 모이면 방 두 칸은 금세 차고 넘쳤다. 제사가 끝나면 친척들은 그 밤을 세우고 아침을 들고 뿔뿔이 흩어졌다. 사촌들까지 합치면 아이들 소리와 어른들 소리가 뒤섞여 잠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죽은 이를 모시는 자리였지만, 그날의 제사는 분명 산 사람들의 자리였다. 제사는 그렇게 상실을 한데 모았다가 다시 삶 쪽으로 밀어주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용악의 〈달 있는 제사〉를 읽을 때면 쓸쓸해진다. 묘한 어긋남이 느껴진다. 시 속의 제사는 너무나 고요하다.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정안수 한 잔 떠놓고 지내는 제사이기나 하듯, 친척도 말소리도 북적임도 없다. 돌아오시리라 믿었던 기대는 기대에 머물고, 밤새 우는 어머니를 지켜봐야 하는 어린 화자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시 속의 풍경은 달빛과 하얀 박꽃, 그리고 이슬이다. 너무도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이미지들이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제사’라는 자리 위에 놓여 있다는 데 있다. 달빛은 차갑고 고요하며, 초가지붕을 타고 올라갔을 하얀 박꽃은 밤에 피었다가 아침이면 이미 시들기 시작할 것이다. 박꽃 속의 이슬 또한 아침이면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 자연물들은 위로라기보다, 위로가 되지 못한 슬픔을 대신 감당하고 있는 풍경처럼 보인다.
우는 어머니를 지켜봐야 하는 아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다가가 안아줄 수도 없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다. 그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의 눈물을 바라보는 일, 그 자체가 아이에게는 감당하기엔 너무 큰 짐이다. 그래서 아이는 슬픔을 말이 아니라 풍경으로 붙잡는다. 어머니의 눈물은 이슬이 되고, 제사의 밤은 달빛으로 정리된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분위기를 어린 마음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생존 방식에 가깝다. 그 결과 시는 고요해졌지만, 그 고요는 평온이 아니라 밤새 젖어 있는 침묵이다.
보통 제사는 죽은 이를 통해 산 사람들의 연대와 전승을 확인하는 자리다. 혈연을 다시 묶고, 기억을 나누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이 시의 제사는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상실은 공동체로 흡수되지 못한 채 어머니와 아이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제사에서는 삶의 무게와 상실감이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다.
이 시를 읽으며 느끼는 짠함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지켜보며 너무 이르게 어른의 슬픔을 알게 된 아이의 시간이 겹쳐 오기 때문이다. 제사가 끝났는데도 마음이 여전히 제사날 밤에 머물러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떤 상실은 시간이 흐르고 의식을 치른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이용악의 〈달 있는 제사〉는 그 사실을 달빛처럼 고요하게, 그러나 이슬처럼 분명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