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내려놓지 못한 짐
김소월의〈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 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1923, 배재)
죽어서도 내려놓지 못한 짐
김소월의 〈접동새〉는 설화에 기반을 둔 시다. 그래서 이 시에는 다듬어진 상징보다 조금은 가공되지 않은 이야기의 결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접동 접동’ 하고 우는 새의 소리로 시작되는 시는 곧바로 계모의 시샘에 죽은 누나의 사연으로 이어진다. 울음이 먼저 나오고, 설명은 나중에 온다. 김소월은 슬픔을 해석하기보다,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그렇게 울고 그렇게 전해 왔을 법한 정서의 온도를 시 속에 그대로 둔다.
이 시에서 가장 마음에 오래 남는 대목은, 억울하게 죽은 누나가 원망이나 저주로 울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지만, 그 울음의 이유는 계모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아홉이나 되는 남동생들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는 데 있다. 이 대목에서 접동새는 억울한 혼이기보다, 어린 동생들을 두고 먼저 떠나야 했던 누나의 미안한 마음에 가깝다. 죽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밤마다 이 산 저 산을 옮겨 다니며 동생들이 있는 쪽으로 울어대는 존재.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끝내 책임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죽음조차도 여성이 짊어져야 할 집안의 짐을 내려놓게 해 주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 지점에서 〈접동새〉는 분명 잔혹하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깊이 내면화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누나는 보호받지 못했고 결정권도 없었지만, 돌봄의 의무만큼은 죽어서도 놓지 못한다. 접동새가 이 산 저 산을 옮겨 다니며 우는 모습은 원혼의 방황이라기보다, 책임이 끊어지지 않는 구조의 지속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김소월의 시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누나를 분노의 상징이나 구조 비판의 도구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김소월은 누나를 끝까지 ‘사람’으로 남겨 둔다. 여기서 사람으로 남긴다는 말은, 어떤 의미나 이념으로 환원하지 않고 감정을 지닌 한 존재로 붙잡아 둔다는 뜻이다. 누나는 저항하지 않고 고발하지 않으며, 다만 가족을 향해 마음이 남아 있는 존재로 남는다. 따라서 접동새의 울음은 남동생들을 거두지 못한 미안함이 감정으로 내면화된 책임의 소리다.
이 점에서 김소월의 접동새는 서정주의 〈귀촉도〉와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귀촉도는 저승까지 다녀와 은하물에 목이 젖은 새다. 그 울음은 개인적 관계를 넘어 존재의 운명을 알고 돌아온 자의 울음에 가깝다. 반면 〈접동새〉에서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다’는 말은 환생이나 초월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도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음의 형상화다. 접동새는 이승에 남아 밤마다 가족을 향해 마음을 쓰는 존재다. 〈접동새〉는 관계 안에 남은 슬픔이고, 〈귀촉도〉는 관계를 건너 초월의 자리에 선 슬픔이다.
그래서 김소월의 시는 따뜻하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안온함이 아니라, 구조 안에 머무는 슬픔의 온도다. 억울함보다 미안함으로 우는 접동새, 죽어서도 가족을 향한 마음을 접지 못한 존재. 김소월의 시적 여인들은 대체로 정한에 머문다. 님을 보내며 그리는 마음도, 누나가 접동새가 되어 우는 마음도, 세계를 흔들기보다 감내의 얼굴로 남는다. 그렇기에 김소월의 시는 저항의 언어라기보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살아온 여인의 감정을 가장 낮은 온도로 기록한 시라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은 그 구조를 흔들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여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슬픔을 감당하며 살아왔는지를 지치지 않고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