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또 다른 故鄕〉
윤동주의 〈또 다른 故鄕〉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백골이 따라오는 고향
이 시는 오래 붙들고 있게 만든다. 읽을수록 뜻이 정리되기보다 질문이 늘어난다. 고향에 돌아왔다고 한다. 타지에서 방황하다 귀향한 것일까. 그런데 고향에 돌아온 첫날 밤, 그를 맞이한 것은 따뜻한 가족의 품이 아니라 “내 백골”이다. 그것도 ‘따라와’ “한방에 누운” 백골이다.
이 백골의 정체는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죽어 세월에 씻긴 뼈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상징으로 치환하기에도 쉽지 않다. 조상의 것인지, 미래의 자기 모습인지, 아니면 이미 한 번 죽음을 통과해버린 자신의 잔해인지 선뜻 단정할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은 어디선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따라와’ 눕는다. 이 동사는 무심히 넘길 수 없다. 백골은 고향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와 함께 있었고, 고향에까지 동행한 무엇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고향은 원인이 아니라 드러남의 자리다. 타향에서부터 지니고 있던 어떤 상태가 고향에 이르러 분명해진다. 살아 있으나 이미 닳아 있는 상태, 숨은 붙어 있으되 생동을 잃은 상태. 백골은 죽음이라기보다, 시대를 통과하며 오랫동안 조금씩 마모되어온 자신의 형상에 가깝다. 그래서 그것은 완결된 죽음이 아니라, 지금도 “곱게 풍화작용”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둔 방이 우주로 통하고, 바람이 소리처럼 불어오는 가운데, 그 백골의 풍화를 바라보며 누군가 눈물짓는다. 그러나 그 주체 역시 분명하지 않다. 내가 우는 것인지, 백골이 우는 것인지,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모호함은 혼란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 화자와 백골과 혼이 아직 완전히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간이 세 겹으로 겹쳐 있다. 살아 있는 나, 이미 소진된 나, 아직 완전히 떠나지 못한 나. 고향은 그래서 안식의 장소가 아니라, 자기 분열이 드러나는 자리다.
이렇게 읽고 나면 고향은 더 이상 평온의 공간이 아니다. 돌아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내가 어떤 상태로 살아왔는지를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하는 자리다. 고향이 나를 살리지 못한다는 인식, 공간의 이동으로는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는 자각. 이 시는 귀향의 서사가 아니라, 귀향의 한계를 드러내는 기록처럼 보인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지조 높은 개”다. 이 개는 외부를 향해 짖지 않는다. 어둠을 짖고, 그 어둠 속에 있는 “나”를 쫓는다. 만약 이 개가 나의 지조 없음을 탓하는 존재라면, 그것은 외부의 비판자가 아니라 내부의 기준일 것이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최소한의 윤리. 백골과 함께 눕는 상태를 오래 허락하지 않는 힘. 그래서 화자는 쫓기는 사람처럼 “가자 가자.”라고 말한다. 더 늦기 전에 벗어나야 한다는 재촉이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가. 백골이다. 그래서 그는 “백골 몰래” 가자고 한다.
이 시에는 두 개의 고향이 있다. 하나는 돌아온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가지 못한 자리다. 전자는 백골이 따라붙는 고향이고, 후자는 백골 없는 상태를 향한 고향이다. “또 다른 고향”은 처음의 고향과 다르다. 돌아왔다고 해서 평온을 보장해주는 곳이 아니다. 어떤 상태로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자리로서의 고향이 아니라, 그 상태로는 더 이상 있지 않겠다는 선택의 방향이다. 그것은 지리적 장소라기보다 존재의 조건에 가깝다. 백골이 함께라면, 다시 말해 이미 닳아버린 상태 그대로라면, 어디로 가도 고향일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고향이다.
따라서 “또 다른 고향”은 도착지가 아니다. 도착하면 완성되는 장소가 아니라, 도착했다고 믿는 순간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자리다. 고향이 하나로 닫히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돌아왔지만 평온하지 않았기에 그는 또 다른 고향을 부른다. 고향은 회복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가게 하는 이름이 된다.
이 시에서 고향은 도착이 아니라 드러남이다. 그리고 드러나면 다시 떠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향이 아니라 '또 다른' 고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