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45

윤동주의 〈별 헤는 밤〉

by 인상파

윤동주의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 鏡, 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어떤 이름은 별이 되고 어떤 이름은 풀이 되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투명하고 고즈넉하다. 가을 하늘과 별빛, 그리고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동경을 얹는 장면은 한없이 서정적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세는 청년의 모습은 부드럽고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 별들은 지나간 시간이고, 함께 책상을 나란히 했던 아이들이며, 이국의 소녀들이고, 가난한 이웃이며, 시인들이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들을 다시 살려내는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시를 한때 향수의 시로 읽었다.


그러나 읽어도 읽어도 묘하게 슬프고 서러운 느낌이 가시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별을 세는 시선이 바깥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내던 화자는 마침내 자기 이름 앞에 선다. 그 많은 이름은 직접 불러보면서 정작 자기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내 이름자를 써 보고 /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시의 공기는 달라진다. 낭만적이던 밤이 긴장으로 바뀐다.


이 시가 단순한 그리움과 향수의 시가 아닌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별을 세는 행위는 그리움의 표출이라기보다, 어쩌면 정체성의 점검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라는 구절은 그리움의 대상을 흐릿하게 만든다. 어머니도, 친구도, 고향도 분명 멀리 있지만, 그보다 더 모호한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은 어쩌면 화자 자신일지 모른다.


어머니를 두 번 부르는 대목은 절절하다. 어머니는 고향이고, 유년이며, 존재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조차 “별이 아슬히 멀 듯이” 멀리 있다. 어머니를 부른 직후 자기 이름을 쓰고 덮어버리는 구조는 더 뼈아프다. 그를 키운 존재들 앞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별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다. 타인의 이름은 빛으로 복원하면서, 자기 이름은 흙 속에 묻는다.


이 모습은 자기 검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검열이라기보다, 존재의 기준을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성정에 가깝다. ‘나’는 이 이름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묻는 태도. 그래서 안쓰럽다. 자기 검열을 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엄격하게 스스로를 재기 때문이다. 외부의 눈보다 더 엄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을 향해 열어 둔 빛의 자리에 끝내 자신을 올려놓지 못하는 태도. 그가 묻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어쩌면 아직 감당하지 못한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에서 그 결이 드러난다. 직접 부끄럽다고 고백하지 않고 벌레를 내세우며 ‘딴은’이라 단정하지 않은 채 물러선다. 고백하면서도 끝까지 단정하지 않는 머뭇거림. 이 여백이 윤동주식 정서와 윤리를 만든다.


그래서 〈별 헤는 밤〉은 낭만적으로 시작해 점점 긴장이 도는 시다. 별빛은 맑고 고요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자기 성찰이 진행된다. 아침이 쉬이 오고, 내일 밤이 남아 있고, 청춘이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을 다 헤지 못한다고 말하던 그 문장은 한때 멋있게 들렸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것은 가능성의 선언이면서도, 어쩌면 결단을 미루는 숨 고르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시는 끝내 절망으로 닫히지 않는다.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꽃이 아니라 무성한 풀이다. 찬란한 부활이 아니라 낮고 흔한 생명이다. 별빛처럼 멀리 빛나는 이미지가 아니라, 땅 가까이에서 조용히 번져가는 생명. 그는 자기 이름을 별의 위치로 끌어올리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는다. 묻어버린 이름 위에 풀이 자라날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랑처럼’이다. 자랑하겠다가 아니라 자랑처럼. 단정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한 발 물러선 말. 이 시는 끝까지 요란한 선언을 하지 않는다. 가능성을 열어두되, 그것을 낮은 톤으로 남겨둔다. 별이 되지 못한 이름은 풀로 남는다. 빛나지 않겠다는 결심과, 그렇다고 사라지지 않겠다는 다짐이 겹쳐 있다.


어떤 이름은 별이 되고, 어떤 이름은 풀이 된다. 윤동주는 자신을 별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라지게 두지도 않았다. 묻어두고, 기다리고, 낮게 자라나기를 바란다. 별처럼 높이 빛나기보다 풀처럼 오래 남겠다는 태도. 그선택 속에 그의 엄격함과 순수가 함께 배어 있다.


그래서 〈별 헤는 밤〉은 별의 시이면서 동시에 풀의 시다. 멀리 빛나는 것과 가까이 자라는 것 사이에서, 한 청년의 엄격함과 안쓰러움이 나란히 서 있다. 그리고 그 별빛 아래에서 우리는 문득 묻게 된다. 나의 이름은 지금 별인가, 아니면 풀인가. 혹은, 아직 흙 아래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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