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김소월의 〈먼 後日〉

by 인상파

김소월의 〈먼 後日〉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무심한 당신과 나의 유예


김소월의 〈먼 後日〉을 읽으며 자꾸 답답해졌다. 시가 애절해서가 아니라, 화자가 꼭 나 같아서였다.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있으면서도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 지금은 못 잊으면서, 미래를 빌려 와 잊은 척을 상상하는 사람. 그 유보의 태도에 가슴이 꽉 막혀왔다. 먼 훗날이 아니라 가까운 시일에 정리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사랑이라는 말은 얼마나 쉽게 사람을 속이는가. 당사자에게도, 상대에게도. 어쩌면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대상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두고, 믿고 싶은 만큼 포장하고 미화해 온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는지도 모른다.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나를 사랑한 건 아닐까. 그 감정에 취해 멈춰야 할 시점을 ‘먼 훗날’까지 유예해 온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의 허상을 계속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김소월의 화자도 어쩌면 그랬을지 모른다. 잊고 싶었기 때문에 저편의 시간을 상정한 것이 아니라, 차마 끊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이 생 안에 남겨 둔 채 먼 훗날로 미루어 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먼 후일〉은 잊을 수 없음의 노래가 아니라 잊어야 함을 아는 사람의 노래일지도 모른다. 잊고 싶지만 아직 잊지 못하는, 그래서 미래를 빌려와 스스로를 설득하는 사람의 시. 중심이 흔들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흔들린 중심을 되찾고 싶어 하는 몸부림의 기록.


이 시를 읽다 보면 자꾸 ‘당신’이라는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당신은 ‘나’에게 지나치게 매정하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찾는 쪽은 언제나 당신이고, 기다리는 쪽은 화자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다. 그 당신은 화자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잊었느냐고 묻지도, 나무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돌아선 순간부터 자기 삶을 살아갈 사람이다.


그래서 화자는 일어나지 않을 장면을 상정한다. 혹시라도 당신이 묻는다면, 혹시라도 나무란다면. 그때는 “잊었노라”라고 말하겠다고. 그러나 그 말 앞에는 단서가 있다.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잊지 못하는 사람은 화자이고,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당신이다. 이 불균형이 속 쓰리다.


매정함은 잔인한 말에서 오지 않는다. 그저 돌아보지 않는 태도에서 온다. 사랑은 때로 미움보다 무심함이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김소월의 화자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나’를 확인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내'가 잊든, 못 잊든 무심하게 흘러갈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그는 먼 훗날을 상정한다. 지금은 잊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잊었다고 말하겠다고. 그 말 속에는 당신의 매정함을 인정하는 체념이 담겨 있다. 당신은 나처럼 붙들지 않을 사람. 나처럼 되짚지 않을 사람. 나처럼 미화하지 않을 사람.


어쩌면 그래서 먼 후일로 유예하면서 더 매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붙들고 있는데 당신은 이미 놓아버린 사람이라. 이 시가 답답한 진짜 이유는 화자가 나 같아서가 아니라, 그 시 속의 ‘당신’이 내가 잊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사람 같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잊겠다는 말을 미루며 잊지 못하는 나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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