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朝餐〉
정지용의 〈朝餐〉
햇살 피여
이윽한 후,
머흘 머흘
골을 옮기는 구름.
桔梗 꽃봉오리
흔들려 씻기우고.
차돌부터
촉 촉 竹筍 돋듯.
물 소리에
이가 시리다.
앉음새 갈히여
양지쪽에 쪼그리고,
서러운 새 되어
흰 밥알을 쫏다.
밥을 먹는 자의 서러움
시 제목의 ‘조찬’은 아침 식사다. 그렇다면 이 제목이 가리키는 바는 이 시의 마지막 연, “서러운 새 되어 /흰 밥알을 쫏다.”에 놓여 있을 것이다. 1연에서 4연까지 펼쳐지는 비 갠 뒤의 생기로운 자연은 화자의 마음에 닿으며 “물 소리에 /이가 시리다”는 감각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곧 자연과 상반되는 화자의 처지로 이어진다.
비 갠 아침은 얼마나 산뜻한가. 햇살은 말갛게 얼굴을 씻고, 구름은 골짜기로 물러가고, 길경 꽃봉오리는 빗방울에 통통 부풀어 청초하다. 물속의 차돌은 죽순 돋듯 촉촉하다. 자연의 세계는 비를 거치고 마치 한 번 새로 태어난 듯, 한 차례 정화를 통과한 얼굴로 서 있다. 지난밤 화자가 어떤 감정을 겪었는지 시는 말하지 않지만, 마지막 연의 “서러운 새 되어”를 미루어 보면 그에게도 서늘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해 볼 뿐이다.
이 시는 아침 식사를 묘사하기보다 비 갠 뒤 자연의 산뜻한 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길경 꽃봉오리로 보아 계절은 초여름일 터이고, 차돌과 이가 시릴 만큼 또렷한 물소리로 보아 개울가 근처일 것이다. 그렇게 맑게 씻긴 공기가 가슴을 시원히 뚫어줄 법도 한데, 화자는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흰 밥알을 쪼는 ‘서러운 새’로 자신을 그리고 있다.
이 시에는 구체적인 사건의 흔적이 거의 없다. 누가 떠났다는 말도, 상실의 직접적 고백도 없다. 대신 비로 촉촉하고 산뜻해진 자연과 마주한 한 사람의 감각이 있을 뿐이다. 말하지 않고 보여 주는 시인으로서 정지용은 자연을 앞세워 화자의 정서를 곧장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마음을 먼저 말하지 않고, 풍경을 오래 보여 준다.
햇살과 구름, 길경의 꽃봉오리와 차돌,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차례로 놓아두고, 그 사이에서 감정이 스며 나오기를 기다린다. 비를 지나며 정화된 자연의 맑음에 화자의 마음은 곧장 동화되지 않는다. “물 소리에 /이가 시리다”는 감각은 그 간극을 드러낸다. 환희보다 서늘함이 앞선다.
이후 화자는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는다. “서러운 새 되어 /흰 밥알을 쫏다”라는 마지막 장면은 자연의 산뜻한 생기와 대조되는 인간적 조건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자연은 비를 거치며 새로워졌으나, 인간은 그와 무관하게 여전히 먹어야 하는 존재로 남는다. 그 정결한 아침 공기 속에서도 먹고 사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낮게 배어 있다. 번잡하고 반복적인 생존의 무게를 그는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밥알을 쪼는 자세 속에 내려놓는다. 그 동작은 비장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해서 더 서늘하다.
따라서 이 시의 ‘서러움’은 어떤 사건의 결과라기보다, 자연과 상반되는 인간의 조건을 문득 의식하는 순간의 감정에 가깝다. 환하게 열린 세계 앞에서 자신이 놓인 자리를 자각하는 시간. 비는 그쳤고 햇살로 밝은 세상이지만, ‘나’는 여전히 밥을 먹는다.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순간, 아침이 서러워진다.
정지용의 다른 시들처럼 이 시 역시 시대를 타지 않는다. 가끔은 날이 너무 좋아 밥을 먹는 일이 불경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맑음 속에 가만히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먹는다는 것은 몸을 인정하는 일이고, 몸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조건 속으로 돌아온다. 이 시는 그럴 때의 마음을 닮아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럽게도, 인간으로서의 아침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