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177

백석의 「오리 망아지 토끼」

by 인상파

백석의 「오리 망아지 토끼」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나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날어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버린다.


장날 아츰에 앞 행길로 엄지 따러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너라

— 매지야 오너라


새하러 가는 아베의 지게에 지워 나는 산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 난 토끼굴을 내가 막아서면 언제나 토끼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붙잡히지 않는 것들, 그러나 남아 있는 것


이 시의 ‘오리, 망아지, 토끼’는 하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억이 따로따로 흩어져 있던 것들이었을 것이다. 논에서 오리를 잡으려던 날이 따로 있었고, 장날 행길에서 망아지를 보던 날이 따로 있었으며, 산으로 나무하러 가며 토끼를 쫓던 날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시간들은 따로 놀고 있지만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로 겹쳐져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 속에서는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흩어져 있던 날들이 아버지를 중심으로 기억에 남은 것일 터이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보다 누구와 함께였는가였을 테니까.


이 시를 읽으면서 젊은 나의 아버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봄날 들에 나갔다가 일찍 핀 산길의 진달래를 지게 짐에 꽂아오시던 기억이며, 한여름 산딸기를 가지째 베어 오셨던 일이며, 늦가을 서리를 맞은 산의 땡감을 가져오시던 기억이며, 한겨울 연이며 썰매를 만들어주셨던 일까지.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나이였다. 젊은 아버지도 생의 한가운데서 계절의 감각을 놓치지 않고 살던 사람이었다. 논으로 나가고, 산으로 오르며 몸은 늘 고단했을 텐데도 길가에 핀 꽃을 보고, 익어가는 열매를 자식을 위해 꺾어 집으로 가져오던 사람. 아버지는 늘 그 계절의 한 조각을 자식에게 건네주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 시의 아버지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는다.

아이와 오리를 잡으러 논으로 나갔던 아버지는 아이에게 꼭 오리를 잡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논바닥에 바짝 엎드려 숨을 죽이고 오리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오리는 끝내 날아가 버린다. 그 순간의 허탕보다 먼저 아이의 실망스러운 얼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논바닥에서 묻은 흙을 털고 돌아왔을 때 벗어놓은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가 개울물에 젖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얼굴을 했을까.


그 아버지도 아이처럼 시악이 났을까. 아니면 잠시 서 있다가 물이 흐르는 쪽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건져 올렸을까. 아이의 손이 닿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랬는지도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을 것이다. 물기를 툭툭 털어내며 나무라는 대신 그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신을 꿰찼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마음이 물처럼 먼저 흘러가 버린 뒤에야 아버지의 마음은 그 자리에 닿지 않았을까. 시악은 아이의 몫이었고 그 시악이 지나간 자리까지 감싸 안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나면 울고 있던 아이보다 말없이 물에 젖은 것들을 건져 올리던 그 사람의 등이 더 오래 남는다.


망아지. 망아지를 내라고 생떼를 쓰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아버지가 보이는 행동은 또 얼마나 살뜰하고 웃음을 안기는지. “매지야 오너라, 매지야 오너라.” 어린아이와 망아지까지 조심스럽게 다루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망아지를 향해 부르는 그 소리는아이의 마음을 향해 돌아오는 소리였을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잠시나마 갖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얹은 것일 게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웃음 쪽으로 데려오는 사람. 그 아버지가 꼭 곁에 있는 것만 같다.


토끼. 이번에는 산속이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든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아이가 어딜 가나 아버지를 따라다니려 했던 것일까. 나무하러 가는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아이가 토끼를 잡겠다고 조잘거리면 아버지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고 함께 토끼를 잡을 궁리를 해주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한쪽 굴을 막으면 아이는 맞구멍을 막았을 성싶은데 그놈의 ‘토끼새끼’는 다리 아래로 줄행랑을 놓고 만다.


서글퍼서 울상을 하는 아이. 그런 아이를 보고 아버지는 또 어떻게 달랬을까. 꼭 잡아준다고 실없는 약속을 했을까. 아니면 아이 편이 돼 토끼새끼를 마구 욕해줬을까.


어쩌면 그 서글픔은 잡지 못한 토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는 오리도, 망아지도, 토끼도 모두 손에 넣지 못한 것들이었다. 남들은 하나쯤 가졌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끝내 가지지 못했다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날 아이에게 남은 것은 잡히지 않은 것들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 함께였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시를 읽다 보면 아이의 서글픔보다 그 곁에 서 있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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