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하나의 미소 앞에서
『싯다르타』를 처음 읽을 때, 나는 이것을 석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틀린 것도 아니었다. 싯다르타가 고타마의 길을 좇아가는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현실의 자아가 이상적인 자아, 곧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본다면, 이 작품은 분명 그 길 위에 놓여 있다.
석가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본명이기도 하다. 하나의 이름을 둘로 나누어 놓은 것은, 어쩌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두 존재를 갈라 세운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이미 길을 완성한 사람을 향해 나아가는 또 하나의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도달한 자를 따라가면, 언젠가 그 자리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이미 완성된 길 앞에서, 오히려 그 길을 돌아선다. 그리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쪽으로 걸어간다.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것을 갖춘 삶 속에서도 만족하지 못했던 싯다르타는 집을 떠난다. 고행을 택하고, 극단까지 자신을 몰아붙인다. 그리고 마침내 고타마를 만난다. 이미 완성된 사람, 더 나아갈 곳이 없어 보이는 존재.
그러나 그는 그 곁에 머물지 않는다. 깨달음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타마에게서 깨달음을 얻겠다는 친구 고빈다를 뒤로하고, 그는 혼자 길을 떠난다. 그 길은 곧장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사랑에 빠지고, 부를 쌓고, 향락에 젖는다. 수행으로 쌓아 올린 시간들이 무너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는 한때 버렸던 것들 속으로 다시 들어가, 자신을 잃어간다.
그는 한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세 가지로 말한 적이 있다. 단식할 수 있고, 사색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 그 말은 능력처럼 들렸지만, 어쩌면 욕망과 시간에 끌려가지 않는 태도에 가까웠을 것이다. 당장 채우지 않아도 되는 마음, 바깥으로 흩어졌다가도 다시 자기 안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 그리고 결과를 재촉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기다림.
그러나 그는 그마저도 잃어버린다. 배고픔을 견디던 사람은 욕망에 기울고, 사색하던 사람은 흐려지며, 기다릴 줄 알던 사람은 점점 조급해진다. 그래서 그는 더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하지만 어쩌면 그 세 가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기 위해 잠시 놓아두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무너진다. 특히 어린 아들 앞에서.
그 장면을 읽으며 가장 어려운 수행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고행도, 단식도, 명상도 아닌—자식이라는 존재 앞에 서 있는 일. 아무리 수행으로 단련된 사람이라도,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자식은 끊어낼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는다.
그렇게 싯다르타의 길은 위로 나아가기보다, 오히려 아래로 내려간다. 세속 속으로, 관계 속으로, 집착과 실패 속으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평정한 자리에 닿는다. 그 자리에, 다시 고빈다가 찾아온다.
오랜 세월 수행을 이어온 고빈다는 여전히 길 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가르침을 따르고, 옳은 방향을 찾고, 깨달음에 이르고자 애쓴다. 그런 그가 늙은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 앞에 선다.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 채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중에야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고빈다는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그러나 싯다르타는 말로 답하지 않는다. 말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고빈다에게 다가오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라고 한다. 그 순간, 고빈다의 눈앞에서 놀랄만한 일이 일어난다.
싯다르타의 얼굴이 더 이상 하나의 얼굴로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태어나는 얼굴, 죽어가는 얼굴, 사랑하는 얼굴, 증오하는 얼굴, 짐승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 신의 얼굴과 죄인의 얼굴. 그 모든 얼굴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서로 겹쳐지고, 흐르듯 이어진다.
그 얼굴들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윤회의 모습이었지만, 그 윤회조차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겹쳐져 있는 상태로 드러난다. 모든 것은 동시에 존재하고, 동시에 흘러간다. 고통과 기쁨,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서로를 지우지 않으며, 그대로 껴안은 채 흘러간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들 위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미소.
그 미소는 모든 것을 이해한 표정이 아니라, 더 이상 나눌 필요가 없어진 상태다. 자비로운 듯하면서도 조용히 내려앉아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수천의 얼굴이 바뀌어도, 그 미소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그 모든 변화를 통과하고도 남아 있기 때문에 더 또렷해진다.
그것은 싯다르타의 미소였고, 동시에 부처의 미소였으며, 어쩌면 그 모든 얼굴들의 미소였다. 고빈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는 순간, 이미 그것은 멀어진다. 대신 어떤 감정이 먼저 그를 덮친다. 눈물이 흐르고,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는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그는 그제야 깨닫는다. 아니, 깨닫는다기보다—더 이상 붙잡지 못하게 된다. 그가 평생 붙잡고 있었던 것들, 옳고 그름, 길과 방법, 가르침과 도달. 그 모든 것이 그 미소 앞에서 힘을 잃는다. 그 앞에서는 설명할 것도, 따를 것도 없다.
결국 이 작품에서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은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다. 말없이 노를 젓는 뱃사공의 삶,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강. 강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흘러간다. 모든 얼굴을 품은 채,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은 채, 그 강에서 뱃사공은 그 강물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깨닫는다.
인생이란, 붙잡아야 할 무엇이 아니라 흘러가도록 두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흐름의 끝에서 남는 것은, 결국 하나의 표정이다. 고타마와 다를 바 없었던 싯다르타의 미소. 인생이란 수많은 얼굴을 지나 끝내 하나의 표정으로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