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
마음을 굽는 타자기
글을 써야 하루가 정리된다.
글을 써야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글쓰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를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글을 쓴다.
대단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을 적는 글이다.
마음이 다른 사람의 글에 반향하여 울리면,
그 울림을 옮겨 적는다.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한다.
하루라도 거르지 않고 쓰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어떤 날은 한 편의 글이 어렵지 않게 흘러나오고,
어떤 날은 한 문장을 붙잡고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래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날의 나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다.
요즘 들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 생각이 들 때면
친구를 멀리 떠나보내는 것처럼
마음 한쪽이 괜히 짠해진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는 척하다가
결국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순간처럼,
시간은 그렇게
나를 앞질러 갈지 모른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적어두려 한다.
그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아직 그걸 기억하고 있을 때.
때로는
어지러운 생각과 감정에 결박되어 살아가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쓴다.
시를 읽고, 소설을 기웃거리며
그들이 펼쳐놓은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나는
울고 웃는 마음의 결을 더듬어 보고,
사람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무엇 때문에 견디는지를
조금씩 알아간다.
그렇게 해서
덜 미욱하게,
덜 상처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쪽으로 한 걸음씩 가보고자 한다.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를 읽으며
나는 그 제목에 오래 붙들렸다.
그에게 글쓰기는
말 그대로 생존이었다.
그래서 그는 닥치는 대로 썼다.
빵을 구하기 위해
매일 타자를 두드려야 했던 시간.
그 궁핍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삶의 조건이었고,
그 속에서도 그는 글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의 삶을 따라가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보다 훨씬 나은 조건에서 살면서도
힘들다는 말을 쉽게 내뱉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내 삶을 조금 가볍게 다루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도 들었다.
타자기가 아닐 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빵을 굽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누군가는 벽돌을 쌓고,
누군가는 문서를 다루고,
누군가는 사람을 돌보며
자기 몫의 하루를 살아낸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불을 지핀다.
글을 쓰는 일.
나에게 글쓰기는
빵을 굽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덜 중요한 일도 아니다.
생존이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일이라면,
글쓰기는 내 영혼이 잠들지 않게 깨우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다.
한때 나는
글을 쓰지 않던 시간이 있었다.
남편을 보내고 난 뒤였다.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고,
나를 돌아보는 일조차
의미 없게 느껴졌다.
기록한다는 것은
오히려 고통을 더 단단하게 붙잡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쓰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나 자신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허울과 위선과 가식이
조용히 나를 덮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나를 속이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속이기 위해서.
조금 더 나로 남기 위해서.
글을 쓰고 나면
하루가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한 번 머물다 간다.
그날은
조금 더 또렷해지고,
조금 더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폴 오스터가 빵을 굽듯 타자를 두드렸다면,
나는 마음을 굽듯 문장을 쓴다.
타오르지도, 꺼지지도 않게
조심스럽게 불을 지피며
내 안의 것을 한 번 더 살펴본다.
매일 글을 쓰자고 다짐하고
쓴다.
나와의 약속이니 저버리지 말자고
쓴다.
글의 길이가 길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지만,
그 길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 하루를 붙잡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늘 같은 마음으로 돌아온다.
글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