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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Jan 26. 2024

간병일기 13

번민 말고

남편이 낯설다. 남편도 내가 낯설겠지. 인간이란 기억을 상실하면 기존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같다. 남편의 기억체계는 이미 질서라는 것을 잃었다. 가만있다가도 갑자기 두서없는 말을 내뱉는다.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주 오래전의 일을 막 방금 일어난 것처럼 늘어놓는다. 하지만 막 한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개 내가 알고 있거나 나와 함께 한 것처럼  굴며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을 느닷없이 물으며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때마다 남편은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지금의 이 사람이 남편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에 기거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지금 그의 몸에는 그도 알 수 없는 낯선 타인이 기거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그와 결별한 지금의 이 사람은 누구일까. 선뜻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 한 이불을 덮고 살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이방인으로 전락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생겼다.

 

남편이 눈 앞에 있어도 걱정, 눈 앞에 없어도 걱정이다. 온통 남편 생각에 골몰하게 된다. 남편이 안방에서 화장실을 가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는 곧 부엌으로 나와 물을 마실 것이다. 화장실을 갔다오면 꼭 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밤중에도 그렇다. 습관이다. 그에 비해 나는 물을 마시지 못한다. 국물이나 차가 아닌 그냥 물을 마시는 것을 힘들어 한다. 남편이 부엌으로 물을 마시러 왔다가 멍 때리고 앉아 있는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불쑥 한 마디를 툭 던진다. 


“번민할 필요가 뭐 있냐?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둬.”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뭘 물어보면 모른다고 답했던 사람이 맞는가 싶다. 갑자기 세상 이치를 다 깨쳐버린 도사처럼 보였다. 멀지 않은 남편의 미래가 될지 모를 어둠의 세계에서 헤매던 나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그럴까요? 그래야 하겠지요?”

 

그에게 공감의 뜻으로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이미 자신이 한 말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내게 걱정말라고 하고 있었다. 낯설었던 남편의 입에서 시름을 잃게 하는 말이 튀어나오니 또 그것대로 낯설었지만 내 마음에 드리워진 그늘은 조금씩 걷혔다. 요근자에 보지 못한 남편의 모습이었다. 걱정한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걸 알고도 그 걱정과 불안에서 허덕이는 사람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꼬집는 말이었다.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걱정말고 그저 받아들이라는 말이었다.

 

그때만큼은 내가 남편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나를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정말 걱정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착각일지라도 그 순간에 느꼈던 그대로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없는 걱정을 만들고 오지 않은 걱정을 붙들고 있으면서 아픈 사람을 걱정시키지 말 일이었다.(2010년 11월 13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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