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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Feb 03. 2024

간병일기 14

남편의 친구

손이 시릴 정도로 날이 차가워졌다. 어젯밤 아홉시쯤 남편의 대학 동창 상수 형이 집에 와서 하루를 묵고 갔다. 상수 형은 나의 대학 과 선배이기도 하면서 남편에게는 혈육보다 더한 존재다. 5년 전 남편이 뇌종양 수술을 할 때 남편의 부탁을 받고 만삭이었던 나 대신 기꺼이 남편 옆을 지킨 사람이었다. 남편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런 친구가 집까지 찾아왔으니 남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그가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주는 것이 더 없이 고마웠다. 밥을 안 먹었다고 하면서 라면을 하나 끓여달라고 하여 라면보다는 쌀국수가 나을 것 같아서 쌀국수에 공기 밥, 깍두기를 차려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식탁에 앉아 셋이 결혼 전에 놀러다녔던 이야기를 했다. 결혼 전에 나와 남편은 상수 형의 자가용을 얻어 타고 동해안이나 남해안의 유명하다는 여행지를 찾아다녔다. 호시절은 그때로 끝났고 함께 여행 다녔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가정을 이루면서 이후에는 만나기조차 힘들어졌다. 남편의 기억이 아픈 사람같지 않게 제법 또렷했다. 들떠서 얘기를 하다가도 상수 형에게 직장과 거주지를 반복적으로 물었다. 개인사가 복잡한 상수 형은 직장과 거주지를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거북했겠지만 아픈 친구의 반복적인 물음에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그저 허허 웃으며 응해줬다. 그것은 또 그것대로 아픈 사람과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실감케 했다.

 

밤 11시가 가까워오자 남편의 입에서 하던 말이 반복적으로 계속되자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밤이 깊어갈수록 피로감 때문인지 남편의 상태는 나빠져가는데 그럴 때면 헛소리도 잦고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되풀이 한다. 약을 먹고도 안 먹었다고 우기거나 약 먹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거나 하면 그것을 이해시키느라 진을 다 빼고 만다. 어젯밤은 아내가 건네는 약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그리고 밤이면 자기 전에 머리를 감는 것이 일과인데 그것도 패스하고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아마도 잠자리에 들어간 친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상수 형은 오늘 아침을 먹고 열시 반쯤 고향으로 내려갔다. 남편이 그 시간에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다. 상수 형은 자는 친구 얼굴을 한 번 들여다 보고 갔다. 열두시쯤 일어난 남편에게 상수 형이 갔다고 했더니 무슨 말을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친구는 아는데 친구가 온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어젯밤에 친구가 먹은 국수는 기억에 있는지 배고프다며 국수를 찾았다. 뜨거운 국물을 마셔가며 후루룩 국수를 먹는 남편 옆에서 나는 적지아니하게 당혹스러웠다. 그의 기억은 애정의 강도와 무관하게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뇌가 그물처럼 송송 뚫려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때 그의 생도 바람처럼 흩어지고 말 걸 생각하니 두렵고 무서웠다.(2010년 11월 14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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