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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08. 2024

간병일기 27

괜찮음

괜찮음


어제 남편은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기억의 줄을 아주 놓아버린 것 같았다. 같은 말을 수십 번 물어와서 나도 수십 번 반복해서 대답해야 했다. 그게 계속되다 보니 짜증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 상황이 본인도 괴로울까. 도끼날을 쳐들고 온 세월이 아닌 바에야 어찌 그렇게 망각의 속도가 급작스럽단 말인가.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당신 도대체 왜 이리 기억이 깜박깜박 거려요?” 

“늘 그랬지, 뭐.” 

대단치 않다는 말투다. 자기의 망각증세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지하지 못하니 그것의 사실 여부를 따진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남편을 지켜봐야하는 사람만 괴롭지.


남편에게 밤 열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한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열두시가 넘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검색했다. 나는 존 쿳시의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다가 한참 재미가 올라 남편보다 더 나중에 들어갔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남편의 숨소리가 고르지 않다. 입을 이상하게 달그락거리면서 곧 토를 할 것처럼 숨이 막히는 듯, 힘겨워한다. 아, 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심장이 벌렁거리면서 내 목소리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잠자는 아들 녀석이 깰까 봐 작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남편을 불러댔다. 아들이 깨서 울고불고 하면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가 날까 봐. 남편보다 아들을 달래느라고 진을 빼게 될 것이다. 남편은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이상 동작은 잦아들었다.


한참 동안 더 지켜보다가 불안한 마음을 가시기 위해 남편 곁에 누웠다. 남편이 꿈을 꾸는지 무슨 환각을 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잠자코 들어보니 내가 무얼 열다섯 번해서 감옥에 들어가야 한다고, 뜻 모를 말들을 뇌이더니 그마저도 잠잠해졌다. 남편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나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버린 것 같다.

 

조용해진 남편에게 확인을 받아내야했다. 내 눈은 믿을 수가 없으니 그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었다. 괜찮은지.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 내가 괜찮을 것 같아서. 정신을 잘 차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가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여러 번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남편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온다. 괜찮지 않을지라도 괜찮다는 말을 해준 그가 고마웠다. 울렁거렸던 심장이 진정이 돼 갔다.(2010년 12월 2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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