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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12. 2024

간병일기 31

바둑을 두다

바둑을 두다


눈발이 휘날리다. 딸아이는 아침 먹고 방과 후 컴퓨터 교실에 가고, 아들 녀석은 제 방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내 곁에서 빼빼로를 먹으며 <내일은 실험왕>을 들여다본다. 남편은 11시가 넘었는데 아직 기상 전이다. 어젯밤에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오랜만에 남편 걱정, 집안 걱정 다 잊고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는 남편에게 바둑을 두자고 졸랐다. 먹고 나면 소파에서 조는 것이 일과가 돼 낮잠 시간을 쪼개서라도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아들 녀석에게 바둑을 가르쳤으면 하는 마음이 급하게 생겼다. 녀석이 아빠 바둑 실력을 구경도 못하게 될까 봐서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남편이 의외로 바둑 규칙을 잘 기억하고 있다. 어릴 때 형들과 바둑을 두고 놀았다고 했는데 그 기억은 아직 머리속에 있나 보다. 남편이 건강할 때 내가 바둑 잘 두는 사람을 부러워했더니 그것은 머리 좋은 거와 상관없이 잡기일 뿐이라며 그리 좋게 말하지 않았다. 바둑 둘 줄 모르는 나로서는 선망하는 것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것은 머리싸움이니 아이들 두뇌 회전에도 좋은 영향을 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빠가 아이들과 바둑을 두면서 시간을 보내기를 바랐는데 남편은 그걸 달가워하지 않아 바둑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남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제 문제는 남편의 건강과 시간이다.


바둑판과 바둑돌을 남편 앞에 갖다놓으니 흥미를 갖고 나의 바둑선생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게 바둑 용어를 가르쳐준다. 집을 짓는다는 것과 거둬낸다는 것, 접바둑(?)이라는 말 등을. 이해가 부족하니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여러 번을 물어가며 두다보니 조금은 이해가 갔다. 재미도 있었다. 아들 녀석이 아빠한테 배웠으면 하는데 녀석은 겨우 바둑돌을 놓고 있는 나에게 가르쳐달라고 한다. 내가 시원찮으니 남편이 옆에서 도와준다. 머리는 좋아서 바둑돌을 따먹는 것을 금방 익히더니 아빠랑은 안 두고 바둑을 모르는 엄마하고 두려 한다. 아빠랑 두면 이기기가 쉽지 않으니 만만한 엄마를 상대하고 싶은 것이다.

 

한참 바둑돌을 들여다보던 남편은 피곤하다고 소파에 가 앉고 녀석은 계속 나와 바둑을 두고 싶어했지만 나도 피곤하여 더 둘 수가 없었다. 정리하고 안방에 들어가 누웠다. 녀석이 엄마를 따라오더니 곁에 눕는다. 녀석에게 지금 아빠랑 바둑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서러운 이유를 설명하다가 아이를 울리고 나도 울컥하고 말았다. 우린 눈물속에서 잠이 들었다.(2010년 12월 27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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