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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15. 2024

간병일기 33

또 발작

또 발작


사방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날, 바깥에서는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고 썰매를 타며 시끌벅적했다. 우리 아이들도 마음이 들떠 바깥으로 내달렸다. 함께 나가고 싶었지만 남편이 걱정이 돼 나가지 못했다. 놀러 나간지 한참이 됐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아이들을 찾으러 나섰다. 집 앞 놀이터에서 논다고 하던 아이들이 정작 나가보니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한 바퀴를 빙 돌다가 연못 근처에서 아이들을 발견했다. 집과는 거리가 있었다. 얼어붙은 연못에서 얼음 덩어리를 꺼내고 눈을 뭉쳐 장난을 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하는 사이에 시간이 지체됐다. 그 동안 남편 생각은 잊었다. 


그런데 아이들과 현관문을 들어섰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집안이 너무 조용하여  불길한 생각이 들어 다급하게 거실로 뛰어들어 갔더니 의자에 앉아 있을 사람이 컴퓨터 책상 밑에 드러누워 있었다. 의식이 없는것은 아니었지만 발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미동을 하지 않고 늘어져 눈을 감고 있으니 아이들이 아빠가 죽기나 한 것처럼 겁을 먹고 울어댔다. 그 소란에 남편보다 아이들 달래는 것이 먼저가 되었다.


아빠 괜찮다, 피곤하면 멀쩡한 사람도 졸도하곤 한다, 아빠가 요즘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다. 봐라, 아빠가 정신은 있지 않느냐. 하며 딸아이와 함께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책상 밑에서 끌어내놓고 두 아이는 방으로 들여보냈다. 서울대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남편의 상황을 설명했다. 지켜보란다. 그럴 수 있다고. 혹시 사람이 축 처져 아주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면 응급실을 가라고 했다. 


다행히 남편은 시간이 지나자 정신을 차렸다. 입에서 흘러나온 분비물이 겉옷에 얼룩졌다. 한두 번 보아온 발작이 아니건만 매번 처음 겪은 일처럼 겁이 나고 무서웠다. 남편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았다. 남편은 암흑의 세계에서 얼마나 허덕였던 것일까. 눈동자를 치뜨며 외계인이나 주워 삼킬 이상한 언어들을 내뱉더니 그것도 이내 잠잠해졌다. 아, 이 사람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무너져 내리는구나, 체념도, 순응도 아닌 신음이 가슴 밑바닥에서 새어나왔다.


생각하는 동물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이 될 때, 더 이상 사고가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으로서 그는 실격일까. 인간으로서 그의 존재감은 거세된 것일까. 사유의 힘이 상실된다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이 뇌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2010년 12월 29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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