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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18. 2024

간병일기 35

악몽

악몽


한해의 마지막 날. 기온이 뚝 떨어졌다. 오전에는 거실 안쪽까지 햇볕이 찾아와 추운 날을 실감하지 못했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오전의 한 때, 아들 녀석은 레고놀이를 하면서 누나가 컴퓨터 게임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관심을 보인다. 남편은 안방에서 취침 중. 따사로운 자연의 선물 앞에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아직도 우리 가정에 평화가 머물러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럴 거라 믿고 싶다.


어젯밤 남편의 상태는 어느 때보다 나빠 보였다. 머리를 감고서 안 감았다고 하는 것은 밥 먹고서 안 먹었다고 하는 것과 조금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닌가. 제 손발 놀려 힘들게 머리를 감아놓고,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건만 남편은 머리감은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감지 않은 것을 감았다고 한다고,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는지 엄청 화를 냈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정도인가 싶었다. 남편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켁켁거리는 것이 심상치 않아서 억지로 거실로 끌고 나오다시피 했다. 이번에는 헛소리를 해댄다. 오페라 연주자들이 생활을 팽개치고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거의 반은 넋이 나가 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쉬게 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다가 옷을 다 적셨나 보았다. 입고 있는 옷이 젖어서 갈아입을 옷을 내놓았더니 내복 위로 새로 꺼내놓은 내복을 그대로 입으려 들었다. 젖은 옷을 벗고 입으라고 했더니 왜 벗으라고 하냐며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옷이 젖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 감느라 옷이 젖었다는 것을 말하니 머리감은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제서야 옷들이 젖은 것을 알아차리고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서는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남편을 기다리며 졸음을 없애려고 읽던 책을 내팽개쳤다. 남편을 기다리는 반시간 동안 사하라 사막의 열기와 남극의 냉기가 이미 몇 번씩 내 몸 속을 훑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거미줄에 포박된 곤충처럼 온갖 궂은 생각들에 포박돼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보낸 후 잠결에 악몽을 꿨다. 남편의 병세가 악화돼 사람이 아주 못쓰게 되었다. 빼빼마른 체구의 남편이 방안에서 구토를 한다. 토사물을 쏟고 정신없이 울고 있다. 아들 녀석 몸에 토사물이 튀겨 나는 그걸 닦아내려 애를 쓴다. 장면이 바뀌어 거대한 무덤 산에서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행군을 한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무덤들뿐이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밤에 무덤 산을 왜 오르고 있는 것일까. 꿈이 너무 생생하여 아침 잠자리에서 울먹였다.(12월 31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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