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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n 22. 2023

문 여사 파우치와 봉사활동 이야기

한 가족의 자원봉사활동 이야기


"우리 어머니 공식직함은 전업주부다. 결혼하신 1983년부터 오늘날까지 24개월을 제외하고는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분이고, 거의 항상 아버지 월급으로 생활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빨래, 청소하기가 어머니의 본업은 아니다. 이 분이 정치인인지, 사업가인지, 교육자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소소한 언어논리와 의식주, 눈앞에 입시 따위는 초연한 채,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식에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는 '비저너리(visionary)'로서의 능력은 탁월하다. 비록 세브란스병원 봉사활동을 어머니 보다 내가 먼저 시작했지만 간헐적으로 봉사활동을 한 나와는 달리 어머니께서는 지난 10여 년간 세브란스에서 꾸준히 봉사하고 계신다."


이 글은 2022년 9월 <나는 파우치를 만듭니다>는 에세이를 출간한 문일선 작가의 아들 홍성휘 의사가 책 표지에 어머니를 간단히 소개한 내용이다.


문일선 작가는 고향 친구의 부인으로, 나는 그의 자원봉사활동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다.

평생 주부로 살면서도 가족이 있는 곳에 늘 함께 있었다. 아프리카건 미국이건 스리랑카건 남편이 직장 생활을 할 때면 그 직장 구성원으로,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그 학교 학생으로 함께 했다. 덕분에 신나는 세상 사람들은 작가의 친구가 되어 지금도 교류하며 지낸다.

동네 야채가게 어르신들에서 아프리카 아줌마, 브라만 인도 고위 공무원, 살사댄스 강사 출신 미국 의대 교수, 정통 뉴요커 수지아줌마, 아들에게 'A&B 장학금'을 주신 억만장자 부부, 아이비리그 교수에 이르기까지.

집 근처 종합병원에서 우연히 시작된 봉사활동! '남을 돕는다'는 거창한 의미는 애당초 없었다. 주부로 살면서 남는 자투리 시간이 아까워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작가의 또 다른 삶을 살게 했다.

병원 봉사실의 바느질팀을 통해 배운 어설픈 재봉 솜씨로 만든 파우치! 작가는 이것을 만들어 전 세계에 뿌렸다. 세상의 고마움에 대한 작가의 표현 방법이다. 아들이 유학생활을 할 때에는 백 개씩 여러 번 만들어 보냈고, 사부인께도 몇 백 개를 만들어 드렸다.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유니세프, 라파엘크리닉, 야채가게, 이것들은 거대한 작가의 놀이터다. 여기서 만나는 모든 이들은 작가의 친구다. 작가는 요즘도 어디를 가나 늘 파우치를 몇 개씩 가방에 넣어 다닌다. 그래서 오늘도 작가는 파우치를 만든다.

문일선 작가의 남편, 홍호표 박사는 1978년 동아일보사 기자로 입사하여 36년간 재직하고 국장으로 정년퇴직했다. 그는 재직 중 대학원을 다니면서 공연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특임교수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아들 성휘로 부터 봉사활동의 길을 안내받아 지금까지 세계를 무대로 자원봉사활동을 펼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며칠 전, 우리 집 근처 카페에서 홍 사를 만났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주한캄보디아문화원에서 한국어를 무료로 가르치고 오는 길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최근에 출간한 책을 내밀었다. 그 책은 KOICA 국제협력단원으로 스리랑카 와라카폴라 기능대학에서 2017년부터 2년간 한국어를 가르칠 때 틈틈이 스리랑카에 관한 모든 정보를 취재형식으로 '스리랑카의 전통ㆍ생활, 문화현장 리포트를 수록한 500여 페이지의  <북을 메었으면 계속 두드려라>는 책이다.

책의 제목은 스리랑카 속담인데, 일단 결혼했으면 헤어지지 말고 잘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스리랑카 사람들, 특히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싱할라인들의 전통과 문화, 생활양식, 가치관 등에 대한 직접 체험이자 취재 기록이다. 인터넷에 있는 일반적 정보나 근거가 부족한 채 구전되는 정보가 지니는 부정확성의 덫을 피하기 위해 몸으로 부딪치면서 나름대로 깊은 정보를 얻고 확인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홍 박사는 스리랑카에서 2년간 해외봉사활동을 마치고 다시 남미 볼리비아로 봉사활동을 가기 위해 영월에 있는 KOICA 연수원에서 힘든 교육을 수료하였으나 코로나19가 발생하여 출국할 수 없게 되자 한 때에는 인터넷강의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할 당시 홍 박사의 아들 홍성휘 의사가 자신이 다니던 종합병원을 그만두 코로나19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재난의료지원팀에 지원하여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녁 뉴스로 보고 알게 되었다. 그는 연세대 의전을 다닐 때부터 의료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우간다, 네팔, 몽골, 온두라스 등 세계 9개국에서 수 천 시간을 의료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으며 연세대 의전원 시절에는 MSD청년슈바이처상을 수상했다.


나는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대학생 때, 몇 번 농촌봉사활동을 제외하면 자원봉사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들곤 다. 

어느 친구는 의사인 아내 또는 자식과 의료봉사를 하고, 누구는 성당 연령회에서 신자들장례일을 헌신적으로 돕는 경우도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그 일이 사회봉사라고 스스로 자위할 수 있었지만 퇴직 후, 특별한 사회활동 없이 세월을 그냥 흘러 보내는 내 처지가 간혹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봉사활동이란 남을 돕기 위해 나 스스로를 희생하는 활동이다. 인간의 욕구 중 최상위에 있는 자아실현의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홍 박사 가족의 헌신적인 자원봉사활동을 생각하면 라는 생각이 들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과 짠맛을 잃지 않는 소금처럼 살아가는 그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낼 수밖에 없다.


파우치를 만드는 문 여사의 20여 년의 다양한 자원봉사활동,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고 한국에서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할 때에 온몸으로 국민의 생명을 지켜낸 홍성휘 의사, 스리랑카에서 코이카의 국제협력단원으로 2년간 봉사활동을 치고,  누구도 쓸 수 없는 귀중한 책을 비매용으로 발간한 홍 박사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내 나이가 어느덧 고희의 언덕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홍 박사가 봉사의 길을 안내하여 오는 일요일부터 주한캄보디아문화원에서 코리아드림을 꿈꾸는 캄보디아 산업근로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그간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지 못한 나 자신성찰마음으로 열심히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싶.


탈무드에는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향수를 뿌릴 , 몇 방울 정도는 나 자신에게도 묻기 때문이다.'는 명언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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