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만식 Jul 05. 2023

히말라야를 걷는다

  깊은 밤, 애절한 노래 가락이 히말라야 계곡에 울려 퍼지고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북과 피리 소리에 맞춰 히말라야 산골 처녀가 날렵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네팔 전통 민요 '레삼 삐리리'를 합창하였다. 우리도 춤판에 끌여나와 춤을 흥겹게 추었다.


   2003년 11월, 직장 동료들과 함께 네팔을 다녀왔다. 10일 동안 카트만두와 휴양도시 포카라를 비롯, 여러 유적지를 관광하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코스(ABC)를 트레킹 하였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네팔에서의 감격은 잊을 수 없고, 지금도 그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네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히말라야산맥이다. 그곳은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신비의 땅이다. 총길이 2,400km의 히말라야는 세계의 지붕으로 일컬어지며, 산스크리트어의 눈(snow)을 뜻하는 '히마'와 거처(dwelling)를 뜻하는 '알라야' 두 낱말이 결합된 복합어로 눈의 거처, 즉 만년설의 집을 의미한다.

   히말라야산맥에는 해발 8,000m를 넘는 고봉이 많다. 네팔은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여덟 개를 보유한 국가로 지형이 험악하기로 유명하다. 종교는 힌두교(87%), 불교(8%), 이슬람교(4%) 등의 분포를 보인다.

   방콕에서 타이항공을 타고 몇 시간이 지나자 카트만두 시내가 멀리 내려다보였다. 도시는 잿빛이고 매연으로 자욱했다. 상상하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라 다소 실망스러웠다.

   카트만두 국제공항에 도착하, 현지 가이드 '사카'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행운을 축원한다는 흰 스카프를 목에 걸어 주었다. 이 스카프는 카타(Khata)라고 하는, 네팔 속에 있는 티베트 문화라고 한다. 카트만두 공항에서 트레킹의 출발지, 포카라시(市)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기다렸다. 공항 대합실에는 한국 여성 몇보였으며 석가모니가 탄생한 네팔 룸비니에 성지순례차 입국한 불교 신자들이다.

   포카라행 프로펠러 경비행기에 탑승했다. 얼핏 보기에도 작고 낡은 구형 비행기였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여성 승무원이 솜뭉치와 사탕 2개를 주었다. 솜은 비행기 소음 때문에 귀막이용으로 주었고, 사탕은 탑승객에게 서비스로 제공하는 선물이다. 비행기에서 창밖에는 눈 덮인 히말라야 자태가 아득히 나타났다.



  포카라에 도착하여 시내 호텔에 투숙했다. 경제적으로 세계 최하위권 네팔에 이토록 화려한 호텔이 있다니 정말 놀랍고 신기했다. 이 호텔은 대리석으로 장식하였고 사원 같은 모양으로 시설도 최신식이다.


   다음날 아침, 전세버스를 타고 트레킹 출발지, 나야폴로 향했다. 네팔 사람들은 서로 마주칠 때마다 두 손을 합장하고 "나마스테!"라고 소리 내어 인사한다. 아침, 낮 구분 없이 하루 인사가 똑같다. 이 말은 산스크리스트어로 " 안녕하세요, 잘 가세요"라는 뜻이다. 합장하고 허리를 낮추는 모습이 경건해 보였다.

버스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리며 네팔의 민요 레삼 삐리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현지 가이드와 포터들이 흥이 났는지 따라 불렀다. 사랑을 고백하는 네팔의 대표 민요로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비단 같은 내 마음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은 감출 수 없구나


사랑스러운 그대에게

내 마음을 전해 주고 싶네

한 발 두 발 그대 곁으로

더 가까이 가고 싶네


바람결에 흔들리는

비단 같은 내 마음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은 감출 수 없구나


   나야폴에 도착하여 우리가 각자 가지고 온 약 20kg 정도의 배낭 두 개를 하나로 묶어서 포터들이 짊어졌다. 우리는 작은 배낭을 등에 메고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오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실 때 스님이 나타나 목탁 대신 마니차를 돌리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불경을 중얼중얼 읊었다. 동료 한 사람이 시주하니 스님은 가버렸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비를 쓰고 산길을 걸어 롯지(lodge)에 도착할 때 즈음 소나기는 멈췄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오 달빛에 멀리 보이는 눈 덮인 히말라야 모습이 신비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네팔의 식사는 현지식 달바트(쌀밥과 카레) 식사 후에는 밀크티를 숭늉처럼 마셨다. 포터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서 맨손으로 카레와 밥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트레킹을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멀리 보이는 설산과 깊은 계곡 속에 그림같이 펼쳐진 계단식 논밭이 전부였다. 하루 종일 오솔길과 계단길을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저 멀리 높은 산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아름답게 보였다. 가이드에게 폭포 이름을 물어보니 이름이 없다고 대답했다.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수량이 계절 따라 바뀌니 그런 경치는 있다가도 사라지니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저녁 무렵, 시누와 마을(2,500m)에 있는 롯지에 도착했다. 가이드와 상의하여 식용으로 염소 한 마리를 다. 포터들은 능숙하게 염소를 잡아 돌판 위에 고기를 구웠다. 네팔의 달바트만 먹고, 일주일을 걷기엔 영양 보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먹어 보았으나 맛이 괜찮았다.

우리 일행은 직장 동료 28명, 가이드 3명, 포터 14명으로 총 45명의 대식구이다. 염소고기 파티가 끝나자 현지 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우리와 마을 주민과 함께 즐길 히말라야 계곡축제가 준비되어 있었다. 롯지 마당에는 우리 일행과 계곡 마을 주민들로 꽉 찼다. 인근 롯지에서도 구경 온 사람들이 꽤 많아서 마당이 비좁았다.

   시누와 현지 주민들은 네팔 계곡의 주황색 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우리들 목에 걸어주고 히말라야에 방문한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했다. 일부 주민들은 네팔 전통 복장을 하고 능수능란한 솜씨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었다. 북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둥둥~ 두둥둥~. 네팔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목청을 높여서 네팔 전통 민요 '레산 삐리리'를 합창했다. 네팔 전통 복장을 한 시골 처녀가 손을 높이 들고 뒤틀면서 날렵하게 춤을 추었다. 가이드와 포터들은 신이 났고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합창하는 노랫소리에 고요한 히말라야 계곡이 쩌렁쩌렁 울렸다.          

   주민들 표정이 밝고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감사의 표시로 미리 준비한 지역발전기금을 주민 대표에게 전달하였으며, 그들이 돌리는 모금 쟁반에도 약간의 기부금을 각자 알아서 올려놓았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걸었다. 비탈길 능선에 있는 마을을 통과할 때, 어린아이들이 나란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손을 내밀고 사탕이나 초콜릿을 달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사탕과 초콜릿 등을 선물로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 미군에게 받았던 껌이나 초콜릿을 네팔 아이들에게 돌려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탈길 옆에 조그만 운동장이 있는 학교가 보였다.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볼펜을 선물하니 신기한 듯 쳐다보고 고맙다는 미소를 슬며시 지었다. 서양 사람들은 마을 아이들과 악수는 하지만 과자나 학용품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난 한국인들은 지금 가난한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높고 비탈진 급경사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계단도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여 서서히 고도를 높였다. 피곤하면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면서 힘을 냈다. 가끔씩 고갯길 언덕에 바람에 펄럭이는 신비한 오색 깃발이 지친 우리를 응원하였다. 긴 줄에 매인 오색 깃발은 티베트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티베트 말로 '다루촉'이라 다. 깃발에 경전을 쓰고 바람이 한번 불면 경전을 한번 읽었다고 믿는데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생겨난 것으로 불교의 자비심이 느껴졌다. 바람이 많은 고원지대에 사는 티베트 사람들은 바람을 신의 뜻을 전하는 전령이라고 믿고 있다.

   좁은 산길에는 말똥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고 가끔씩 내려오는 등산객들의 "나마스테!" 인사가 대화의 전부였다. 길이 좁아 혼자서 말없이 걸어야 한다. 우리 일행의 대열은 길게 늘어져 있고 마치 군인들이 행군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포터들은 엄청난 무게의 배낭을 짊어지고 묵묵히 산길을 걷는다.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먼저 출발하여 도착지에서나 볼 수 있다. 포터들은 20대부터 4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그들은 저녁식사 후에 허름한 장소에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였다.

  

   네팔 트레킹 내내 현지 가이드와 수시로 대화를 나눴다. 책임 가이드 '사카'는 석가모니와 같은 성씨로 네팔의 국립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한국어 연수를 갔다 온 경력이 있다. 경희대에서 한국어 교육과정을 6개월 이수하여 한국어를 웬만큼 할 줄 알았다. 보조 가이드 '라마'는 영어를 잘하지만 한국어는 거의 몰랐다. 카트만두에 있는 여행사 직원이었는데, 피부색이 약간 검었지만 생김새는 우리와 비슷하고 최선을 다해 우리를 정성껏 보살폈다.

   포터들의 일당을 알아보았는데, 그들이 가져가는 몫은 하루 5달러쯤 된다고 한다. 온종일 40kg 넘는 짐을 메고 히말라야 산속을 걸어도 우리 돈으로 5천 원 남짓한 금액을 받고 있다. 내 짐을 메고 가는 포터에게 나이를 물었더니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대학을 재학 중 휴학을 하고 포터 일을 일시적으로 하고 있었다. 내 자식과 비슷한 나이라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트레킹 하는 동안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가끔 휴게소에서 음료수를 대접하니 고맙다는 표정으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인간은 어느 나라에서 출생하는가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기에 속세는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속에서 며칠을 보내니 마음이 편안하고 트레킹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해발이 제법 높아져 '히말라야 롯지'에서 잠잘 때는 슬리핑백 속에서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추웠다. 서서히 고산증 비슷한 증세가 나타났다. 11월의 네팔 날씨는 고도에 따라 사계절을 모두 느낄 수 있다.


   트레킹 4일째 되는 날. 코스는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를 거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로 가야 한다. 멀리 보이던 마차푸차레가 가깝게 보였다. 이 산은 두 개로 갈라져 있는 봉우리 모습이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네팔어로는 물고기 꼬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마차푸차레라는 이름의 'fish tail'로도 잘 알려졌다. 마차푸차레는 히말라야 유일의 미등정 산으로도 유명하고, 1957년 지미 로버트가 이끄는 영국 등반대가 정상 50m 앞까지는 등반한 적이 있으나 네팔인들이 신성시하는 산으로 등반이 금지되어 있다.

   해발 4,000m 가까워지자 고산증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발걸음도 공중에 살짝 떠 있는 기분이 들었고 은근히 피곤했다. 마차푸차레 롯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조금 더 걸어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에 도착했다. 한마디로 감격스러웠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꼬박 4일을 걸어서 도착한 것이다. 안나푸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수확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이제부터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오던 길을 되돌아서 다시 걸었다. 코스 중간쯤 옆길로 빠져 촘롱이란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히말라야 산속에서 보내는 6일째, 마지막 날 밤이었다. 포터들과 함께 송별의 파티를 열었다. 산속에서 술은 거의 먹지 않았지만 오늘은 맥주와 네팔 위스키 럼주를 마시며 서로의 고생을 격려하고 특히, 포터들이 신나게 놀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14명의 포터 모두가 수고했지만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인 포터를 투표로 선발하여 '베스트 포터상'을 금일봉과 함께 선사하고 노고에 보답하였다. 동료 한 사람이 수상자를 목마 태워 마당 한 바퀴를 돌았다.

   포터들이 즐겁게 노는 것을 바라보며 인간 세상은 무대만 다르지 살아가는 이치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짐을 운반해 준 포터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약간의 팁을 주었다.

   다음날, 트레킹을 한낮에 끝내고 히말라야 계곡을 빠져나와 전세버스로 카트만두 시내로 돌아왔다. 한국 식당에 들러 삼겹살과 야채를 맛있게 먹고 숙소에서 편하게 잠을 잤다.

   그다음 날, 날씨가 화창하고 좋았다. 오늘은 카트만두에서 관광객들이 호기심을 갖고 찾아가는 파슈파티나트 화장터로 갔다. 카트만두에 있는 파슈파티나트 힌두사원은 갠지스 강 상류에 해당하는 바그마티강에 접한 네팔 최대의 힌두교 성지이고 대표적인 화장터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원 근처 공원을 둘러보니 도를 닦고 있는 힌두교 수행자 여러 명이 이곳저곳에 요가하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머리와 수염은 길고 얼굴은 분가루를 칠했는지 괴상한 모습이다. 명상을 하고 있는 도인 모습이 신비롭게 보여 사진을 슬며시 찍었더니 눈을 뜨고 있었는지 벌떡 일어나 모델 값을 달라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팁을 주었지만 뜻밖의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돈의 위력은 도인과 일반인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진짜 수행자는 강가나 산속에서 도를 닦고 있지 관광객이 넘쳐나는 도시에 있을 이유가 없다. 별 직업이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갠지스강의 지류인 성스러운 바그마티강은 규모가 작고 지저분했지만 힌두교인들은 생전에 이곳에서 몸을 씻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면 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화장터가 잘 보이는 맞은편에서 화장하는 광경을 쳐다보았다. 장작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맨몸의 시신을 천으로 덮었다. 흰옷을 입은 상주가 시신을 돌고 나서 장작 위에 놓인 짚더미에 불을 붙였다. 사원 위로 불꽃과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주변에 시신과 장작 타는 매캐한 냄새가 번져 나갔다. 그러나 고인이 극락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라 유족들은 덤덤한 표정은 짓고 있다. 강가에는 물에 빠진 동전이나 귀금속을 줍는 듯한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아이들은 물장난을 치면서 놀고 있다. 사원 위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니 망자가 극락세계로 가는 모습같이 보였다.

  

  그곳에서 나와 보다나트 사원으로 이동했다. 이 사원은 티베트의 불교 사원이다. 불교가 힌두교 나라 네팔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1959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면서 티베트 난민들이 히말라야를 넘어 대거 몰려들면서이다. 이곳에는 부다 수투파, 즉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티베트의 불탑이 있다. 이탑의 상층부에 그려져 있는 두 눈은 지혜의 혜안, 코는 해탈, 입이 없는 것은 묵언을 상징한다고 한다.          

   모두가 수투파를 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홀수로 돌아야 한다. 마니차를 돌리며 탑돌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니차는 손으로 돌리는 경전으로 이것을 돌리면 대신 경을 읽어주는 기구이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심전심으로 불경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수투파 사원을 중심으로 많은 사원과 기념품을 팔고 있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가게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티베트 불교의 기도 명상 음악이 마음을 감동시킨다.

   '움메니반메훔~ 움메니반메훔~' 이 말은 산스크리스트어로 '온 우주에 충만한 지혜와 자비가 모든 존재에게 그대로 실현될지이다'는 뜻으로 여섯 글자의 불교 진언이다. 가게에서 '움메니반메훔' 명상 음악 CD와 딸에게 줄 작고 예쁜 보석 상자를 샀다.

 

   마지막 여행 코스, 덜발광장으로 갔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고 옛 왕궁을 중심으로 독특한 분위기의 사원과 신상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광장 북쪽에는 신 하누만 동상과 여신으로 추앙받는 살아있는 쿠마리 데비를 모신 사원이 유명하다.

   쿠마리는 종교와 관계없이 추앙을 받고 있는 살아있는 여신이다. 쿠마리의 기원은 옛날 칼레주란 힌두 여신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카트만두 왕국에 내려왔었다. 여신의 미모에 반한 왕은 여신을 극진히 모시던 중 이성을 잃고 여신을 범하려 했다. 분노한 여신은 하늘로 올라갔고 왕은 돌아올 것을 열심히 빌었으나 여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된 왕의 간절한 기도에 누그러진 여신은 그에게 초경을 겪지 않은 순수한 어린 여자를 선택해, 그녀를 자신의 분신으로 섬기라 명했고 네팔의 왕들은 현재까지 그 명을 이행하고 있다. 광장에는 아이들이 뛰어놀았으며 상인과 관광객이 뒤섞여 혼잡했으나 네팔인들의 표정에서는 엄숙함을 읽을 수가 있었다.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를 트레킹 하면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네팔인들의 삶을 보고 그들의 행복과 생존의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종족이 다양한 종교를 갖고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그들도 추구하는 최종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상당한 네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마음으로만 행복을 추구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행복이란 일상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라고 규정할 때, 정신적 만족 없이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풍요한 삶이란 물질과 마음이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지 않을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싶다.

가운데가 라마 가이드

   히말라야를 다녀온 지 5년쯤 지난 어느 날, 트레킹 할 때 보조 가이드를 하면서 우리를 헌신적으로 도왔던 '라마'가 서울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장 동료 여러 명이 명동에 모였다. 네팔 여행 때, 내 룸메이트였던 최 부장은 라마를 나이키 매장으로 데리고 가, 멋진 신발을 선물하였다. 우리는 호텔 식당에서 환영 파티를 열었는데, 라마가 감격하여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진지하게 영어로 했으며 우리는 박수로 화답하였다.  


   17년 만에 네팔 여행의 추억을 글로 써보니, 마음으로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여행의 강한 인상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어, 그곳에서 겪은 추억과 감정을 그대로 기술하는데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지금도 히말라야 고갯길 언덕 위에 바람에 펄럭이고 있을 오색기, 다루촉과 애절한 목소리의 '레삼 삐리리'를 그리워한다. 다시 그곳을 찾아가 흰 눈이 덮인 설산을 바라보고 또 걷고 싶은 마음이다. 네팔의 전통 민요 '레삼 삐리리'를 들으며 잠시나마 마음속으로 다시 히말라야를 걸어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대판 부적 행운의 2달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