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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l 10. 2023

영호정 상량문

나의 조상은 강원도 동해시 송정동에서 400여 년을 살아왔다. 송정(松亭)은 송림이 우거지고, 정자가 여럿 있는 마을을 뜻하며, 정자(亭子)란 산수가 좋은 곳에 쉬거나 풍류를 즐기며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옛적, 삼척군 북평 지방(현 동해시) 선비들은 경치가 좋은 마을 주변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동해시 송정동에는 영호정(暎湖亭), 애연정, 호해정, 범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동해항 조성 공사로 말미암아 애연정과 영호정은 천곡동으로 이건 되고 범사정은 없어졌다.

영호정

송정마을 동쪽에는 화랑포가 있었다. 남쪽에는 오곡의 물결이 파도치고 북으로는 마을의 저녁연기가 들판을 뒤덮었다. 동해 바다의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는 거울 같은 호수에 가득 찼다. 한도 없이 울창한 푸른 소나무 그림자는 호수와 어우러지고, 해당화가 모래 언덕에서 향기를 풍기는 해동(海東) 최고의 낙지(樂地)가 아니겠는가?

임신년(1932년) 2월 향리 문사(文士) 홍용학을 비롯하여 62인이 문사계를 조직하니 바로 송림계(松林契)다. 그들은 병자년(1936년) 6월, 화랑포 북쪽 언덕 우거진 송림 가운데에 정자를 짓고 현판을 걸어 영호정(暎湖亭)이라 하였다. 화창한 봄날과 하늘이 높은 가을, 정자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으니 옛날 노장을 본받아 죽림에서 놀던 죽림칠현에 비유되었다.


觀魚於湖上(관어어호상)

화랑호 위해서 고기 노니는 것을 보고


吟詩松陰(음시송음)

소나무 그늘에서 시를 읊으니


稱衰世盛會(칭쇠세성회)

세상은 망해가는데 모임은 성대하다.


일제가 한민족을 억압한 지 30년이나 되어 선비의 한(恨)이 시(詩)에도 서려 있다. 1977년 5월 정서가 넘치던 영호정은 동해시 천곡동 한섬으로 옮겨졌고 관해정(觀海亭)이라 이름조차 바뀌었다. 옛 터전은 동해항 조성으로 수몰되어, 옛말대로 상전벽해였으니 세상 일이 덧없이 변하고 말았다. (출처 : 전천강은 흐른다. 東原 김영기 著)

관해정

영호정 상량문은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조부이신 강암 홍정현(洪政鉉, 1875년~1938년) 지었으며 그 역문은 다음과 같다.


   영호정 상량문


때는 9월이라 계 모임을 해변의 송림에서 했다. 술 권하면서 시 읊기에 흡족하고 화랑호는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니 이에 좋은 정자 짓는 일을 경영하였다. 그리하여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그 일을 완성한 것이다.


생각건대, 송정이라는 촌락은 척주(陟州, 삼척시의 조선시대 이름)에서 으뜸가는 승지(勝地)로다. 남쪽 서쪽 북쪽 삼면의 산은 평야를 둘러싸고 주위는 70~80리요, 이곳 송림은 마을을 둘러싸니 3~4백 가구를 안았더라. 재능 있는 인사가 많이 나타나니 사대부의 기북이요, 예의로 서로 사양하니 풍속은 주남을 닮았더라. 많은 선비가 계첩에 기록되고, 좋은 터에 정자를 짓기로 정해졌으므로 공사자가 새삼 생각하니 길섶에 지은들 어찌 염려가 있을 텐가? 오만에 기대어 세월을 보내지 말고 죽림칠현을 본받아 좋은 날짜 택하여 깊은 정 펼치니 난정(蘭亭)의 모임과 같도다.


깨끗하게 두둑 열어 두 칸 정자 바라보니 아침에는 해가 기둥에 뜨고 낮에는 서까래를 비추니 때를 기다리는 것 같고, 육지에는 호수가 있으며 동쪽에는 바다인지라 어찌 터가 없다 하겠는가? 구름의 흰 그림자와 하늘의 푸른빛이 함께 호수에 배회하니 이보다 더 좋은 곳 어떻게 얻으리오. 높은 곳 시원한 기상 서산에 가득하니 누구와 더불어 더 좋은 것 견주리오.

아름답도다. 한줄기 호수 뒤에 두 칸 정자로다. 추녀와 서까래가 먹줄 따라 바르니 수십 일에 공사가 완공되고 금전과 곡식이 주머니와 자루에서 나오니 터럭만 한 낭비도 없었다.


거울 같은 호수에 바람은 고요하고 구슬같이 맑은 달 비추는 저녁이라. 이미 깊은 곳에서 좋은 경치 얻었으니 영호정 화려한 액자 닮아 마땅하다.


풍경이 서남으로 더욱 아름다우니 항주의 미륵이요, 산하가 고금이 같지 않으니 주이의 심정이라. 만약 음식과 기거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낙(樂)을 부치고 부침과 득실이 있을 때는 한가로이 물가에 노닌다.


오호에 맞추어 상량문을 짓는다.


어엿차, 상량을 동(東)에 올리니 고암(할미바위) 머리에 오르는 태양이 제일 먼저 붉도다. 돌아가는 신선의 바닷길 멀지 않고 구름은 삼신산 위에 있도다.


어엿차, 상량을 서(西)에 올리니 도화 담수는 선계에 가깝더라. 도화의 붉은 물에 그물질하지 마라. 고기 잡는 배 길 잃을까 두렵도다.


어엿차, 상량을 남(南)에 올리니 섬마을에 남은 저녁노을이 산 밖으로 떨어진다. 만경대 놀던 사람 왕래가 부절이라.


어엿차, 상량을 북(北)에 올리니 푸른 솔숲 우거졌도다. 병풍같이 둘러서 비바람을 가리니 마을 이름 예부터 송정(松亭)이라 지었네.


어엿차, 상량을 위로 올리니 끝없는 저 하늘은 어찌하여 저렇게도 맑은가? 옛 선비 다 돌아가고 이을 사람 없으니 다만 빌 건데 밤에 문창성(文昌星) 빛나게 하소서.


어엿차, 상량을 아래로 올리니 뜬 세상 영화는 야생마와 같도다. 좋은 땅에 티끌 먼지 없으니 글하는 신선들 날마다 술에 취하네.


원하건대 상량 후에 신께서 잘 보호하고 경치 또한 예보다 좋아져 관동팔경에 들게 하고 풍류도 좋아져서 낙양천재(洛陽千裁)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이루소서.

                                                           1936년 8월

                                                                             강암 홍정현 지음


현재, 동해시 송정동의 아름답던 호수와 정자 등은 동해항으로 개발로 옛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천곡동으로 이건된 관해정에는 영호정의 상량문 현판이 걸려 있다. 상량문을 바라보면 강암 홍정현 선비의 혼이 아직도 정자에 서려있는 듯하다.

아, 영호정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선비들은 다 어디로 떠나고, 관해정이 홀로 푸른 동해 바다를 쓸쓸히 바라보고 서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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