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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l 10. 2023

추억의 환율 게시판

축하 꽃다발을 받으며 정년퇴직한 지 8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내가 평생 근무한 외환은행은 외국환 업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기 위해 재무부와 한국은행이 1967년에 설립한 국책은행이었다. 특히, 대기업과 무역업체를 중점 지원, 육성하여 한국의 경제 성장에  역할을 담당했다고 자부한다.


요즘은 환전을 하기 위해 외환은행을 합병한 하나은행에 가끔 들르곤 다. 고객대기 번호표를 손에 쥐고 은행에 걸려있는 환율 게시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옛적, 내가 만든 환율 게시판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흐뭇하다.


1992년 8월시카고지점에서 3년간 해외근무를 마치고 본점 외환업무부에 부임했다.  당시 은행의 경영목표는 고객만족이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당연하지만 그 시절에는 혁신적인 말처럼 참신하게 느껴졌다. 은행 문턱을 낮추고 고객위주의 경영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부장님은 책임자 회의시간에 고객위주 경영에 적극 동참할 수 있는 신상품 개발이나 제도개선 등을 선도적으로 해볼 것을 독려했다. 내가 담당하는 외환관리과의 업무는 외국환 업무의 기획, 규정, 제도개선과 외국환 법규의 해석 및 신상품 개발 등이었다.


은행의 경영목표에 맞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분석한 결과, 당시 은행에서 쓰는 환율 게시판이 은행 위주로 표시되어 고객이 이해하기 어렵고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율은 외환의 가격으로 자국 화폐와 외국 화폐의 교환 비율을 뜻한다. 두 나라의 화폐를 어느 한 나라의 화폐 단위로 표시하는데, 대부분 국가는 외화를 기준으로 표시한다. 우리나라도 외화를 기준으로 하여 환율을 표시한다. 즉 1달러의 가치를 원화로 표시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은행에서 사용하는 환율 게시판에는 전신환 매도율, 전신환 매입율, 일람출급수출환 매입율, 여행자수표 매도율, 매매기준율로 표시되어 일반인이 게시판을 보고 본인이 원하는 거래에 적용할 환율이 얼마인지 알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전 세계에 있는 해외지점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그 나라의 환율 표시방법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약 일주일 후 답신을 정리하였는데, 모든 나라가 은행을 기준으로 전문용어, 즉 전신환 매도율, 매입율과 기준 환율(Basic Rate)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집할 의도에서 협조를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수차례 부장님과 논의한 결과 외환은행만의 독창적인 환율 표시를 해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은행의 조직은 보수적이라 획기적으로 변화를 주는 것은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다. 만일 일이 잘 되었을 경우 칭찬 몇 마디가 전부일 수가 있고 만일 일이 그릇쳐 문제가 발생할 때에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새로운 환율 게시판을 만들기 위해 직원들과 여러 번 회의를 거치고, 은행 입장이 아닌 고객 입장에서 환율을 표시하고 전신환이나 매매라는 어렵고 전통적인 용어를 거래 구분에 따라 표시하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한편, 수백 개 지점에서 사용하는 환율게시판이 천여 개에 달하므로 관련 예산도 만만치 않고 만약 고객의 호응이 좋지 않을 경우 난처할 것이란 걱정도 있었다.


'환율게시판 고객 위주 개선(안)'이라는 제목의 품의서를 작성하여 결재를 올렸다. 이 품의서는 관련 부서 합의를 거쳐 담당 임원과 최종 전결권자인 은행장 결재를 득했다. 품의서의 제목에서 표시하였듯이 고객 위주라는 거창한 말에 관련 부서는 아무런 합의 의견도 달지 않고 합의를 하였다.

새로운 환율을 표시한 게시판이 시범 영업점으로 배부되자 직원들은 낯선 고객위주의 용어를 보고 은근히 웃기도 했다. 이러한 게시판은 전 세계에서 외환은행이 유일했다. 얼마 후 고객들 반응을 영업점을 통하여 조사해 본 결과 아주 이해하기 쉽고 편하다고 좋아하였다. 그래서 홍보기사를 작성하여 각 신문사로 발송했다.

고객 만족을 위해 외환은행이 전격적으로 몇십 년 동안 사용해 온 환율게시판을 고객위주로 교체했다는 기사가 나오자 외환은행의 환율 게시판이 주목받기 시작하타행들도 환율게시판을 외환은행처럼 교체했다.


내가 만든 환율 게시판이 지금까지 고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흐뭇한 감정으로 가슴에 다가온다. 하지만 '외환은행'이란 이름을 지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마음이 허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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