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선배
밤새 첫눈이 내렸다. 아파트 거실에서 창 밖을 바라보니 흰 눈이 멀리 보이는 남한산을 뒤덮고, 정원의 나뭇가지에도 소복이 쌓여 겨울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첫눈이 내리면 누구나 왠지 마음이 설레고 옛 시절의 추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내 마음은 벌써 눈꽃이 만발한 올림픽공원과 아파트 숲을 지나 한강을 가로질러서 연세대 캠퍼스에 다다랐다. 그런데 아내가 "여보, 밤사이 첫눈이 왔는데 올림픽공원 산책하러 갈래요?"라고 말했다. "첫눈인데 참 많이 왔네."라고 건성으로 대답하자 이어서 "왜, 또 첫눈이 내리면 만나자던 여자친구가 생각나세요?"라고 아내가 예리하게 내 정곡을 찔렀다. 은근히 빗대어하는 말이지만 아내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군대 가기 전, 6명이 어울려 친하게 지냈는데 여자 친구는 가정대 4명, 고교 1년 선배와 나는 상대에 같이 다녔다. 우리는 연세인들의 뒤뜰 청송대에서 자주 만나 수다를 떨었다. 청송대(聽松臺)는 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진 쉼터로, 소나무 소리를 들으며 자기를 성찰하고 조용히 명상을 즐기는 곳인데 우리는 너무 심하게 떠들면서 자아를 찾았던 것 같다.
1970년대 초반은 허구 한날 시국 관련 데모로 세월을 흘러 보냈고, 휴교를 밥 먹듯이 했던 시절이었다. 캠퍼스 내에도 출입이 수시로 통제되었기에 청송대보다는 학교 밖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던 나는 신입생 때 의례적인 몇 번의 미팅을 제외하고는 대학시절 내내 이성교제는 어렵고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딱히 대학 생활에서 추억할 만한 것이 없었던 내게 가정대 여학생들과의 만남은 정말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멋진 여성들이었다. 부잣집 큰딸로 모든 일에 거침이 없고 눈웃음이 일품이었던 파마머리 맏언니, 리더십이 뛰어나고 배려심이 깊은 단발머리 맏며느리감, 미국으로 이민 간 야무지고 세련된 똑순이, 그리고 꽃무늬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긴 생머리 날리며 뭇 상경대 남학생의 마음을 훔치곤 했던 칠레로 이민 간 친구, 바로 가정대 주생활과 4인방이다. 특히 미니스커트 친구가 상경대 앞을 지날 때면 잔디밭에 앉아 있던 남학생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는데 가끔은 나를 아는 척해주어 나를 부러워했다.
우리는 주로 동교동 언덕에 있던 바로크 카페에서 만났는데, 시내로 나오면 영락교회 앞 애플 카페에 들렀다. 주로 커피를 마시며 청바지와 통기타의 청년문화를 논했는데 흥이 오르면 파라다이스나 마주앙을 곁들이기도 했다. 비용은 부친이 은행원이었던 고교 선배나 동교동 양옥집에 사는 맏언니가 대부분 부담했다. 호주머니가 넉넉지 못했던 나는 늘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으나, 대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은 톡톡히 하여 나를 빼고는 모임 성사가 어려웠다. 때로는 정원이 예쁜 동교동 집으로 갔으며 겨울철에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큰 담요 밑으로 발만 넣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마이티 카드놀이를 주로 했다. 카드놀이도 좋았지만 담요 밑에서 발가락 부딪치는 재미가 어떤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입대하기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고 우리는 동교동 집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연인끼리 손잡고 봐야 할 영화, '앨비라 마디간'을 조조 상영시간에 감상했다. 하지만 나는 모차르트의 감미로운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자장가 삼아 거의 졸면서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애플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누군가 "우리 내년부터 첫눈이 오면 12시에 여기에서 만나기로 해요."라고 말하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몇 달이 지난 75년 3월, 논산훈련소로 입대하였으며 32개월의 군 생활은 청춘 시절의 꿈과 낭만을 사라지게 했다. 게다가 복학 후에는 취직 걱정이 앞섰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여자 친구들이 기억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즉 이미 흘러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월은 강물을 타고 흘러 30여 년이 지나갔는데 2005년 가을 어느 날 동교동 맏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큰딸이 가입해 있던 싸이월드 덕분이었다. 맏언니가 우연히 사람찾기에서 내 이름을 조회하고 큰딸 방명록에 "아빠 성함이 혹시 박oo? 연대 경영학과 나오지 않았나요?"라고 적어 놓았다. 순수한 큰딸은 연락처를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강남역 부근 샤브샤브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연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반가운 악수를 하고 앉으니 30년 전의 분위기를 찾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그리도 친했었나?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던 약속은 모두 잊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기억을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자정이 다가와도 집에 가야겠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미 30년 전으로 돌아가 그들 앞에서 귀염둥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니스커트 친구가 귀국할 때마다 만나기로 약속하고, 학창 시절에는 해 보지 못했던 허그로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물론 오늘은 30년 전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내가 화끈하게 쐈다.
12시가 넘어서 현관문을 막 들어서는데 "여보, 오늘 여자 만났지요?" 아내의 조용한 돌직구에 화들짝 놀라서 술이 깨고 등골이 오싹하게 소름이 끼쳤다. 아침 출근 때부터 뭔가 조금 이상했다는 것이다. 뭐도 해 본 놈이 한다고 나는 바로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유학 중인 큰딸이 엄마한테는 싸이월드 얘기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날에 나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이유는 집사람에게 들켰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짜릿한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후 미국으로 이민 간 똑순이가 귀국해 또 한 차례 만났고, 어느 날은 세 명이 오붓하게 만난 적도 있다. 결혼 후 이들과의 첫 만남 이후 헤어질 때 두 번의 허그는 자연스러운 인사가 되었다. 우리가 조용히 만난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내가 어느 날 "오늘 당신 얼굴이 아주 좋아요. 이렇게 늦게까지 할 얘기가 많았던 모양이지요?"라고 말하자 방학이라 귀국해 있던 큰딸이 "아빠도 오랜만에 여자 친구 만났는데 할 얘기가 왜 없겠어요?"라고 말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작년에 맏며느리감 친구에게서 미니스커트 친구가 일시 귀국했다는 반가운 연락이 왔었다. 이번에는 두물머리 근처 이태리 식당에서 대학 시절로 돌아가 그동안에 쌓였던 정을 나누며 인생 2막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지 심각하게 토론했다. 우리는 이미 칠순을 넘기는 오랜 친구이자 세월의 무게를 서로 덜어주는 인생길의 도반道伴이 되었던 것이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떠가고 함박눈이 다시 펑펑 쏟아질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첫눈을 몇 번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갑자기 엄습하여 마음이 숙연하다.
"그래, 언젠가는 첫눈이 오지 않겠지. 오늘은 첫눈이 왔으니 내가 먼저 전화를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