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집과 아파트

by 홍만식

요즘 아파트 단지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겨울을 보낸 플라타너스 가지 위에 얹힌 까치집이 눈에 띈다. 처음엔 그저 자연의 한 장면쯤으로 지나쳤지만, 문득 그 빈 둥지를 바라보다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까치는 봄이 되면 부지런히 짝을 지어 삭정이와 깃털을 모아 집을 짓는다. 나뭇가지 위에 위태로이 지어진 그 집은 작고 소박하지만, 한 철을 지내기엔 더없이 충분하다. 까치는 그 집에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2년 정도 살다가 또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집을 짓는다. 그렇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까치는 집 걱정을 하지 않겠구나.’

사람들에게 집이란 단순한 쉼터가 아니다. 삶의 무게이자, 어쩌면 평생을 짓누르는 짐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 가격은 이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고, 지방이라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도 않다. 우리 아파트는 지은 지 40년이 넘었다. 재건축을 앞두고 있지만, 그 기간도 막막하고 비용이며 세금 문제까지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까치가 짓는 집에는 투기나 재건축 이익이 없다. 신축이냐, 구축이냐 따지지도 않는다. 삶을 위한 집일 뿐, 소유나 자산 가치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왜 집 하나를 두고 이토록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할까. 그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영특함'에 도달하게 된다.

도구를 만들고, 문명을 쌓아 올리며 발전해 온 인간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옭아매는 장치도 늘려왔다.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어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경쟁의 무기이자 계급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무주택자의 삶은 그야말로 팍팍하다. 열심히 일해도 내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 전세를 살며 전전긍긍하고, 이사철마다 가슴 졸이며 집을 구해야 하는 날들. 세입자라는 이유만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는 집을 갖기 위해 사는가, 삶을 위해 집을 갖고자 하는가.

오늘도 양재천을 따라 걷다가 플라타너스 꼭대기 가지에 지어진 까치집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다. 그 집은 아무런 허가도 받지 않았고, 담보로 잡히지도 않으며, 소유권 분쟁도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족이 있고, 생명이 있고, 평온한 삶이 있다.

부러웠다. 인간보다 못하다고 여겨온 새가 삶의 본질에는 더 가까운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욕칠정을 지닌 존재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사랑, 욕망이 뒤엉켜 세상을 살아간다. 그 감정들은 우리를 인간답게 하지만, 동시에 많은 고통도 불러온다. 집을 향한 집착과 경쟁, 소유의 욕망 역시 그중 하나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까치는 인간보다 더 지혜로운지도 모른다고. 삶을 짓는 데 필요한 만큼만 집을 짓고, 떠날 때를 알고, 또 다른 둥지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지혜 말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까치처럼 쉽게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 집이 비록 작고 검소할지라도,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기를.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집이 짐이 되지 않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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