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천재 매월당 김시습

by 홍만식


어느 사람이 한양 거리에서 영의정, 정창손과 마주쳤다. 그는 정창손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정창손 같은 놈들 때문에 정치가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치자, 정창손이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하고 물러섰다. 저 미친 사람을 건드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 그곳을 피했다. 이때 소리치던 자가 바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다.


슬픈 천재로 불리는 매월당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 김 씨고, 어머니는 울진 장 씨다. 한양 성균관 근처에서 1435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매우 영민하여 만 3세의 어린 나이에 다음의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


3월은 이미 저물었네


푸른 침으로 구슬을 꿰니


솔잎의 이슬이구나.


이 소문을 듣고 정승, 허조가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老)를 넣어 시를 지어보라고 청하자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지어 허조를 놀라게 했다.


신동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임금 세종이 친히 다섯 살 난 아이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시험을 맡은 박이창이 병풍에 그려진 강변에 접한 정자와 배를 가리키며 시를 지어 보라고 하자 '작은 정자, 배 매인 집에는 누가 사는가?'라고 시를 지었다. 강변에 살던 박이창이 감탄하여 '동자의 학문이 마치 백학이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다'라고 스스로 시를 짓고 댓구를 지어보라고 말하자 김시습은 '어진 임금의 덕이 마치 황룡이 푸른 바다를 뒤엎는 듯하다.'라고 답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에 흡족한 세종은 신동을 칭찬하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었으며 이때부터 사람들은 오세동자라고 불렀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명성을 날리던 김시습은 15세에 어머니가 돌아가면서 인생의 역경이 시작된다. 어머니 산소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김시습은 아버지의 재혼으로 외가에 맡겨졌다. 그 무렵 김시습은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았지만 결혼 생활 또한 순탄치 않았다.


21세에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하던 공부를 접고 책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승명이 설잠이다.


사육신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지만, 생육신은 살아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하며 벼슬길을 권하는 세조의 부름을 거역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승려가 된 김시습은 9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방황했다. 그 방황의 결과로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세조 9년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10일간 교정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한양에 머물렀을 뿐 김시습은 한양을 떠나 경주 남산에 금오산사를 짓고 칩거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으며 매월당이라는 호를 썼다. 김시습은 37세까지 경주 남산 부근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것이다.


금오는 경주 남산 가운데 금오봉을 가리킨다고 한다. 금오신화의 다섯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구체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우리나라의 시공간 속에서 구속을 당하는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설정했다. 금오신화 외에도 많은 시편을 유금오록에 남겼다.


37세 때에는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서울로 올라와 수락산 수락정사 등에서 10년간을 생활했으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가 없다.

10년이 지난 47세에는 머리를 기르고 고기도 먹었다. 안 씨의 여성과 결혼하여 환속하는 듯했으나 나라가 혼란스럽자 관동지방으로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강릉, 양양, 설악 등을 유람하며 지방 청년들을 가르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이때 쓴 100여 편의 시가 관동일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고 1493년 59세에 부여에 있는 무량사에서 병사했다. 따라서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를 한 후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자기의 초상화인 노소 이상을 스스로 찬(讚)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했지만 현재는 매월당집에 '동봉자화진상'만이 인쇄되어 전한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나 배운 바를 실천한 인물이다. (출처-한국인물사)


천재 문인 김시습의 일생을 알고 난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한문 소설을 썼고 시도 시문집에 전하는 것만 2,200편에 달한다. 또한 그의 시 가운데서 역대 시선 집에 뽑히고 있는 것도 20여 수에 달하여 그의 뛰어난 문학적인 천재성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사상가 중에서 김시습처럼 일생 동안 자기 사상을 체화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김시습은 이 세상을 지식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인물이다. 김시습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는 아니지만 불교의 철학적 사유를 유교의 이상과 연결하려고 고심했던 철학자다. 율곡은 김시습이 겉모습은 승려였지만 일상을 유학자로 살았다고 김시습 전기에 썼다.


김시습은 절의를 지킨 샛별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에게는 항상 맑은 청(淸) 자가 따라다닌다. 정조는 청간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김시습 본인도 청한자라는 호를 사용했다. 청한자는 맑고 한가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세간의 명예나 오욕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념을 지키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김시습은 가만히 앉아서 시주를 받아먹는 승려나 비단옷을 입고 과거 공부만 하면서 노비를 거닐고 다니는 양반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김시습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선종의 핵심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출처-인문학 명강, 심경호)


김시습이 서른한 살 때는 경주로 가 금오신화와 많은 시를 썼는데, 왜 경주 남산에 머물렀는지 궁금하다. 어떤 학자들은 김시습은 원효에게서 삶의 길을 발견했다고 한다. 경주 남산에 머물면서 원효의 비를 보고 성(聖)과 속(俗)을 넘나들며 매임이 없었던 신라의 승려 원효의 삶을 추모하였고 그도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김시습의 시조가 태종 무열왕의 6대손, 김주원(강릉 김 씨 시조)이기 때문에 자기 뿌리에 대한 애착이 컸고, 어머니 품속 같은 위안을 얻기 위해 경주에 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는 가정적으로 불행했다. 15세 사춘기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고 아버지는 재혼하였으며, 그의 첫 번째 결혼생활도 원만하지 못했다. 그가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하는 글이 있다.


"아버지는 병약하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새로운 여인을 얻고 나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환경은 유학의 길로 매진해도 그의 허전한 가슴을 채우기엔 부족함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시습은 유학자인지 스님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논란이 있다. 매월당, 동봉, 청한자란 호가 있지만 설잠이란 승명을 갖고 절에서 생활까지 한 스님이었다. 그가 마지막 세상을 보냈던 무량사에서 쓴 글에 설잠이란 승명 대신에 열경이란 자를 썼다. 그는 본인의 의지로 성과 속을 넘나든 유학자이자 스님이라고 엿볼 수 있는 그의 처신이다. 시대의 상황에 따라 속(俗)에서는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산사에서는 불경을 공부하여 '십현담요해' 등 귀중한 불교 서적을 저술했다. 한편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장자와 노자도 연구했다. 따라서 그는 유불도(儒佛道)를 모두 연구하고 그 가르침대로 실천한 참다운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김시습은 목숨을 걸고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남들이 천재라고 칭송하여도 아직까지 절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늘 반성하는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영동지방을 여행할 때, 경포대 옆에 있는 '김시습 기념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천재였지만 한 인간으로 외롭고 슬픈 인생을 살았던 매월당이 떠오르고 마음이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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