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12화
충무로 옷가게는 아직까지도 남편과 나의 마음 깊은 곳에 대못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정도가 됐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충무로의 ㅊ자만 나와도 그때의 기억들이 막 떠올라 스트레스가 훅 올라올 정도로 오랜 시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을 쉽게 갖지 않으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 확실하다. 그렇게 데이고도 가끔씩 생각해 본다. 만약 다시 한다면 지금은 잘할 수 있을까..?
옷가게가 정리되고 같은 해 가을쯤 이번엔 시아버지께서 제안을 하셨다. (이제 좀 무섭다. 누군가의 제안) 시아버님께서 사무실이 필요하셔서 새로 알아볼 참인데 괜찮으면 그 공간 한켠에서 나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어떻겠냐 말씀하셨다. 어차피 사무실을 일주일 내내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워놓은 채 놀리기도 뭐 하니 겸사겸사 너만 괜찮으면 들어와서 편하게 쓰라며 나를 배려해 주셨다. 마침 그때 나는 내가 디자인한 엽서, 달력을 만들어서 소소하게 팔기 시작한 때였고 아버님은 그걸 딱 사무실에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신 거였다.
집에서 쓰고 있던 책상, 의자, 색연필, 노트, 종이 등등 싹 다 그 사무실로 옮기고 한켠에 마련한 내 자리는 옷가게에서 쓰던 행거와 커튼들로 빈틈없이 파티션을 쳐 완벽한 내 공간으로 만들어놨다. 누군가가 내 공간을 막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시아버님이 쓰시는 사무실을 얻어 쓰는 입장이니 최대한 지저분해 보이지 않게 다른 공간이 노출되지 않도록 구분해 놓은 목적도 있었다. 내가 필요해서 쓰는 사무실이 아니라 시아버지께서 필요해서 구한 사무실이니까.
사무실 정리를 마치고 한 달 후쯤 그 사무실에서 시댁 모임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시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그 비전을 놓고 가족회의를 하던 그날 시아버님은 나에게 대뜸 직위까지 주시면서 함께 동참하는 게 어떻겠냐며 이번엔 꽤나 노골적으로 권유하셨다. 저번 시간은 김가네의 장황한 배경설명 강론으로 배를 띄우셨던 거라면 그날 그 자리에선 직접적으로 그물을 던지신 것이다. 거기엔 시댁 외에 다른 남자 어른들도 두 분 계셨고 아버님의 권유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놓여있었다.
듣자마자 불편했다. 시아버지의 일장연설 이후 어딘가 남아있는 찝찝하고도 달갑지 않은 마음과 그 비전에 동하지 않았던 애매한 상태에서, 게다가 이렇게 어려운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권유를 하시는 바람에 나는 당황스러움은 물론 잔뜩 긴장한 채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정적만 고요히 흘렀다.
얼마 되지도 않는 그 짧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 내 마음이 괜찮은 건지 싫은 건지 제대로 된 판단도 서질 않았다. 분명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당연히 하겠거니 하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듯한 눈빛들과 이 분위기가 어떤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절이 어려웠다. 차마 찬물을 끼얹을 용기가 없었다. 어른들의 시선에 기죽어 내 의사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덜컥 겁만 먹고선 날 향해 놓여있는 얼굴들만 멍하니 훑었다. 직위는 모르겠고. 사무실만 관리 해주면 된다고 하니, 어려울 것 없겠지. 시아버님의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또 얼떨결에 수락을 해버렸고 앞으로 닥칠 모든 갈등의 원인은 이 일을 시작으로 눈덩이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그땐 알바를 잠깐 안 다니고 있던 때라 사무실만 왔다 갔다 하면서 시아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창문에 설치할 블라인드 커튼도 직접 디자인해 주문 제작 하고 또 그 외 사무실에 필요한 다른 몇가지 것들은 왠만하면 다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었다. 그렇게 한 달즘 지나 내 디자인 상품 좀 팔아보겠다고 시아버지 사무실 한켠까지 써가면서 뭔가를 하고는 했지만 그것도 하루아침에 용돈벌이가 될 정도로 잘 되진 않으니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옷가게 때처럼 또 나가는 돈만 있고 들어오는 돈은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사업 같은 건 못 할 팔자 같다.^ ^
텅 비어있는 사무실에 얹혀사는 기분으로 종일 마음 졸이며 있을 바에 알바든 뭐든 뭐라도 해야 마음이 놓일 듯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혼자서 일하는 남편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든 상황인 것 같아서, 그런 불편함이 있는데 정작 나는 보탬도 못 되고 있다는 자책과 동시에 공짜로 얻어진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받아먹고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적게라도 버는게 좋겠다 판단했다. 계속 그런 마음으로 사무실에 있자니 스스로 위축이 됐고 누구도 주지 않은 눈치까지 보였다. 근처에 아는 분이 운영하시는 카페에서 주 2-3일 정도 마감알바를 하게 됐고 그렇게 낮에는 사무실에, 저녁엔 카페에서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시아버님으로부터 또 콜이 왔다. 이번엔 이 두 번째 사무실에서 1:1 대화. 이미 한번 겪어봤으니 대화가 아닐 거라는 건 이제 어느 정도 눈치는 챘고 오늘은 어떤 주제로 장황한 이야기들을 펼치실지 역시나 잔뜩 긴장이 됐다. 겨울이라 밖은 일찌감치 어두워졌고 나는 먼저 사무실에 도착해 시아버지를 기다렸다. 카페도 아닌 이 조용한 사무실에서 시아버지와 나 단 둘이라니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약속시간에 맞춰 시아버님께서 오셨고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로 숨이 턱턱 막혔다. 음악이라도 틀어놓을 걸.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번 말씀 또한 장장 몇 시간을 걸쳐해 주셨다. 그리고 이날의 주제는 저번과는 많이 달랐다. 쉽게 말하면 잔소리에 가까웠다. 결혼하고서 했던 사업의 시작과 정리 등 지금까지 나의 모습에서 시아버지는 아쉬운 부분이 많으셨던 모양이다. 돌려 말씀은 하셨지만 뭘 말하고 싶어 하시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그날 그 길고도 긴 시아버님의 말들 사이사이에는 어딘지 모르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다.
“(시누이 이름)은 어릴 때부터 별 일을 다 겪고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세상 물정을 잘 알아. 그래서 지금은 자기 하고 싶은 일 찾아서 열심히 잘해가고 있잖니. 내가 봤을 때 너는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해”
“너무 순진하게 살아온 것도 좋지만은 않아. 착하다고 좋은게 아니야. (시누이)는 너랑 반대라 큰 일을 할 수 있는데 너는 큰 일은 못 할 성격이야. 너는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교회 다니는 사람이 더 악착같이 살아야 돼. 그렇게 순진해서는 세상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을 거야. 교회 청년들 보면 어느 때만 잠깐 열심히 하는 것 같다가도 나중엔 꼭 시들시들해져 있더라. 나약하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니?”
“남자들은 바깥에서 일하고 그러느라 작은 일보다는 넓게 보고 큰 일을 해야 해. 여자는 내조라고 하지? 남자가 챙길 수 없는 부분을 여자가 챙겨주면서 서로서로 그렇게 사는 거야. 너 (남편 이름)이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니?”
“너는 딱히 열심히 사는 것 같지 않아. 니가 해보겠다고 해서 사무실 관리 맡겼는데 갑자기 또 알바를 한다고 하니 좀 난감한 건 있어.”
시아버지는 나에게 충격요법을 쓰셨다. 저런 말들 뿐만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내내 좋지 않은 투로 나에 대한 무분별한 평가와 판단, 비난, 면박을 주셨고 뭘 모르는 애, 많이 부족한 애 대하듯 말씀하셨다. 몇 시간 동안 저런 주제로 말씀하셨고 끝에는
“다 널 위해서, 아빠로서 너를 딸같이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라며, 그날 시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기분 상하는 말들을 잔뜩 해놓고는 다 널 위해서, 좋은 의도로 하는 말들이라며 합리화 하셨다. 듣는 내 기분은 상관 없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로 시작하는 대화는 보통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기보다 내 속에 있는 말들을 시원하게 하고 싶어서 본인 기준에 아쉽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가리지 않고 뱉어 버린다. 그건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말 한 사람은 속시원함을 느낄 지 모르겠으나 가리지 못하고 뱉어버린 그 말들은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남는다. 입장을 바꿔보면 이해가 쉽다.
딸 같아서 하는 말이라는 건 상대방을 생각해주는 척 그냥 잔소리를 하고싶은 변명에 불과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이지 절대로 아빠와 딸의 관계가 아니다.
비슷한 예로,
‘기분나빠 하지 말고 들어’
이 한마디로 시작하는 대화는 이미 상대방이 들으면 기분 나쁠거라는 걸 알고선 기분 나빠하지 말라며 강요하는거나 다름이 없다.
저번 1:1 대화 때처럼 이번에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화자의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청자의 듣는 자세가 삐딱했던 걸까. 마치 이날 시아버지는 나에게 면박을 주려 작정하고 오신 듯 했다. 기분이 좀 상하더라도 비교 당하면 알아듣겠지, 잘 바뀌겠지, 언젠가 날 잡고 이렇게 좀 말할 필요가 있겠다 싶으셨는지 모든 면에서 시누이와 비교를 하셨고 시아버지 당신 마음에 안 드는 온갖 부분들을 다 끄집어내 지탄하셨다.
듣고 있는 내내 나는 마치 영화 겟아웃의 남자 주인공처럼 찻잔 최면에 걸려 온통 시커먼 허공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검은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오길 잘했다. 고개를 반쯤 숙이니 시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내 얼굴 역시도 보이지 않아서 일그러진 표정을 숨길 수 있었다. 눈물까지 터질 뻔했지만, 됐다. 내가 뭘 잘했다고 울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땐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시누이와의 비교부터 시작해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그 자리는 마무리가 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문득, 다른 며느리들도 이러고 사는 건지. 내가 왜 이런 말들을 들어야하는 건지. 원래 며느리들은 시아버지에게 이런 말들을 듣고 사는 건지 궁금했다. 우리 집 시아버지는 나에게 할 말이 참 많은 분이셨다.
‘순진하게 살아와서 세상물정을 모른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 않다’ …
이 말들은 내 삶을 송두리째 무시 당한 느낌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신문배달, 우유배달이라도 하고 다른 곳으로 출근해 종일 일하고 밤엔 대리운전이라도 뛰어야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건가? 그냥 하루라도 빨리 돈이나 벌면서 사는게 나을 것 같아서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고 알바만 해 온 나는 딱히 열심히 살지 않은 건가? 시아버지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다고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까? 이런 생각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절대로 내 삶 자체를 무시하신 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시아버지는 나에 대해 물어보신 적도 없고 나에 대해 잘 모르시니까.
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말들 중 하나는 사무실 관련된 말씀이었다. 일주일 내내도 아닌 며칠만 저녁타임 알바를 하는 게 이 사무실에 어떤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애초에 나 때문에 얻어진 공간도 아니었을뿐더러 왜 시아버지께서 난감하신 것인지, 시아버지 말씀을 듣고서 나야말로 난감했다. 사무실 관리만 집중해서 해주는 줄 알았더니 뜬금없이 또 알바를 한다는 말에 황당하셨던 건가? 시아버님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가는 것 같아서 내가 답답하셨나?
그때 난 그 자리가 만들어진 원인과 내가 그런 말들을 들었던 이유는 내가 알바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멍청하게 얼떨결에 수락해서 생긴 일이다. 그때 시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이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다 내 잘못이다.
대체 나의 어떤 면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셨을까? 참 궁금하다. 마음에 안 들었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말들을 하실까? 듣다가 아니다 싶으면 나도 뭔가 말을 꺼냈어야 했다. 기분이 나쁘면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반박하고 싶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니 듣다 듣다 정 듣기가 싫었으면 그만하셨으면 좋겠다고 하면 됐을 일이다. 그러지 말라고 한 사람도 없었고 입에 테이프칠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나는 몇 시간 동안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이 시아버지의 한마디 한마디를 전부 머릿속에 박아놓고 있었다. 하고싶은 말을 쏟아내는 사람의 속은 후련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아니다. 모든 말은 결국 듣는 사람에게 남는다. 애석하게도 아버님의 충격요법은 나에게 맞는 치료법이 아니었다. 조금도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전달 방식이 그랬을 뿐, 표현하는 스타일이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 시아버지는 내가 아쉬웠을지언정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란 걸 안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시는지 잘 알겠지만 듣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아니, 기분이 매우 나빴다.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비교는 잘못됐다.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날 시아버님의 나를 향한 판단, 비난, 평가, 비하 등. 전달 방식은 잘못됐다.
’너 그런 문제 있는 거 아니?‘
‘너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는 거 알고 있니?’
‘내 딸은 이런걸 참 잘 하는데, 너는 그게 부족해.’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
..
..
그리고 왜 때문인지 그 이후로 시댁 모임 때마다 시아버지는 점점 사소한 부분까지도 시누이와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인지, 뭔가 단단히 마음에 안 드신 모양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마다 기분 나쁜 티 내지 않으려, 최대한 좋게 좋게 받아들이려 노력했지만 애초에 좋은 말들이 아니니 절대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스트레스만 더 쌓였고 엉뚱한 데로 불똥이 튈 뿐이었다.
비교와 판단은 두 번째 사무실에서 멈췄어야 했다. 홍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그 사무실에서의 모든 말들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시아버님 앞에서 점점 입을 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