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13화
그날 사무실에서의 모든 말들을 남편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긍정적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나 또한 남편에게 좋지 않은 투로 전달이 되어버려 말의 유통과정에서 조금씩 문제가 생겼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의 안색도 서서히 변하더니 이내 마음을 다 잡고는
“꼰대 같은 소리 했네. 어렸을 때 나도 누나랑 비교 많이 당했어.”
남편은 아빠의 그런 태도를 잘 안 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옛날부터 남편한테도 그러셨구나.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는 듯하면서도 그 한마디에 내 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눈치 없이 계속 더 말하기 시작했다. 시아버지께서 나에게 했던 말들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전달하는 거라 하더라도 이번엔 순전히 내 입장에서 말하게 되는 것이다 보니 아들인 남편은 좋지 않게 들린 게 당연하다. 자기 아빠를 계속 안 좋게 말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거니까. 한번 끝이 났던 이 얘기를 나는 며칠 뒤 또 꺼냈고 결국은 남편의 심기를 한번 건드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빠잖아. 적당히 해.”
불만이 있었다면,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았으면 남편한테 할 게 아니라 시아버지한테 했어야 했다. 며칠 속으로 곱씹을게 아니라 그때 그 사무실에서 바로 뱉어냈어야 했다. 몸에 맞지도 않는 말들을 죄다 꿀꺽 삼켜버리곤 제대로 소화도 못 시킨 채 그대로 남편에게 배설해 버렸고 결국 우리 관계까지 조금씩 흔들리게 만들었다. 듣다 듣다 더 이상 못 참겠어서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눌러 겨우 말을 꺼낸 기색이 역력했던 그날 남편의 한마디에 나는 처음으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배신감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던 걸까. 내가 어떻게 말하든 그냥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랬던 건가? 끝을 모르고 쏟아내는 배설물들을 그저 말없이 묵묵히 계속 받아주길 바랬나? 똑같이 비교당했었다면 내 기분을 잘 알 텐데 왜 남편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평온한 모습인 것인지. 왜 아버님께 바로 말하지 않고 되려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때 남편은 나에게 그랬다. 아빠한테는 말해도 모르고 절대 안 바뀔 거라며 그냥 무시하라고만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싫었다. 내 상한 기분은 아랑곳 않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넘기려는 모습과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나보고 무시하고 참으라는 말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내가 기분이 나쁘고 싫다는데. 나한테 막말하고 비교하는 시아버지한테서 내가 화가 난다는데. 늘 내 기분은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시아버지를 더 두둔하는 듯한 남편의 태도들이 너무 꼴 보기 싫었다. 그저 서운함과 배신감만 뒤죽박죽 섞여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보긴커녕 역시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생각했다.
마음과 머릿속은 그날의 찜찜함 그대로인 채로 묵혀두고 괜찮은 척 지내기를 며칠, 집에서 엽서와 달력들을 포장하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남편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슬쩍 다가와 포장을 도와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빠 그 사무실 정리할 건가 봐. 너가 안 하겠다고 해서..”
듣자마자 저번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일까. 이번엔 또 뭘까. 애초에 그 사무실은 내가 필요해서 구한 것도 아니었고 내가 얻어달라고 구걸한 것도 아닌데? 아버님께서 필요한 것이니 겸사겸사 한켠을 써라. 하셔서 나는 쓴 것이고 종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없었는데 왜 지금은 내가 필요해서 쓰게 된 사무실이 되어버린 걸까? 게다가 ‘못 하겠다고 해서’도 아니고 ‘안 하겠다고 해서’는 어디서 나온 것이며 심지어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도대체 시아버님 혼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너무 당황스럽고 황당하기만 했다.
결국 며칠 내내 저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찜찜한 마음들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 마음의 소리 그대로 남편에게 '뭔 개소리야?‘ 라고는 할 수 없으니 그냥 울어버렸다. 엽서와 달력을 포장하다 눈물을 주룩주룩 쏟아내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나 그런 말 한 적 없고 아버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 안 간다고.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며. 그 와중에도 혹여 또 싸우게 될까 봐 울면서도 최대한 눌러가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고개 숙인 채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은 아빠랑 얘기해 보겠다고 하고 그 자리는 그렇게 일단락 됐다. 아버님의 두 번째 사무실 제안 때 남편도 분명 옆에 같이 있었고 똑같이 들었는데 왜 나만 황당해 길길이 날뛰는 것이며 저 말을 아버님께서 들었을 때 되묻지 않고 왜 나한테까지 가져왔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고 속이 점점 더 답답해져 왔다.
며칠 뒤 아버님과 얘기해보겠다던 남편은 그 일에 대해서는 딱히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사무실은 정리됐고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사무실을 정리한 이유가 진짜 나 때문인 것인지. 내가 알바를 시작한 게 사무실을 정리까지 할 이유가 되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황당할 뿐이다.
한참 지난 후에야 추측컨대, 나에게 처음 사무실 한켠을 제안하셨던 것부터 대뜸 직위까지 주시며 사무실 관리를 부탁하신 것까지. 어쩌면 시아버지는 그렇게 자연스레 자신의 비전에 함께 동참하게끔 퍼즐을 짜고 계셨던 게 아닐까 한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나의 알바 선언에 참고 참다 결국 터진 것일 게다. 시아버지의 말들과 모든 상황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 뒤로 남편과는 아버님 이야기만 나누면 서로 알게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고 더 얘기하면 할수록 우리 사이만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나중엔 점점 부부관계까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아버님께는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그 어떤 말도 하기가 싫었다. 찜찜한 기분을 그대로 방치해 놓은 채 그렇게 살아갔다.
그때 그 시기에 나는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생긴 듯했다. 근처 지인의 카페에서 알바를 하던 때 마감파트 일이었어서 남편이 퇴근한 저녁시간에 나는 일을 했다. 종종 남편이 내가 일하는 카페로 와서 나 퇴근할 때까지 있다가 집에 같이 가기도 했지만 매일 그럴 수는 없으니 저녁때 떨어져 있는 날이 많았다. 주 3일 하던 일을 4일, 5일 점점 늘려서 하게 된 게 원인이었던 것일까. 나는 난데없이 멀쩡한 남편을 바람피우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작은 불씨로 시작된 불안함이 부지불식간에 온몸을 휘감아 정신이 점점 피폐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