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11화
결혼하고서 나에게 제일 낯설었던 것은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아닌 시아버지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란 사람과는 지내본 적도 없었고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남자 어른을 많이 봐왔어서인지 어떤 사람이든 '남자 어른'과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사실 내게는 굉장히 부담이었다. 친아빠는 안 좋은 기억뿐이어서 말할 것도 없고 새아빠가 생겼을 때도 2년은 지나고 나서야 이제 좀 편해진 것 같다 하는 정도였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냥 동네 아저씨도 아니고 남편의 아버지, 거기다 가족모임 때마다는 회사 관련 일 얘기가 대부분이어서 곱절의 곱절로 어려웠고 마주 앉아있기라도 할 때면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시아버지랑은 무슨 말을 나눠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라 진땀이 났었다.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가족 구성원 중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준다는 아빠라는 자리에 대해 나는 무지했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리를 우리 집은 늘 엄마가 담당해 왔고 동생과 나도 엄마랑만 지내왔기 때문에 아빠들은 가족이라는 그룹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모습으로서 있는지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빠라곤 첫 번째, 물건을 집어던지는 사람. 소리 지르는 사람. 엄마를 힘들게 하고 집에 잘 오지도 않는 사람. 두 번째, 돌아가신 새아빠는 내가 완전히 적응하기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움만 가득 남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 그렇게 살아왔었다고 해서 처음부터 시아버지까지 그저 ‘불편한 사람’으로 낙인찍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불편했던 건 맞지만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었고 서투르지만 잘하고 싶었다. 남편의 아빠니까. 그래서 더 어려웠고 불편했다.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어쩌면 차라리 아예 새로운 단어인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더 나았다. 마치 첫 단추부터 다시 끼우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집에서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K-장녀다. 그렇다고 대화가 없는 집 까지는 절대 아니다. 내 성향이 원체 수다스러운 편이 아닌데다가 누가 물어보지 않는 이상 스스로 내 얘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또래와는 다르게 어른을 대하는 건, 특히나 남자 어른인 시아버님은 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부모님께는 최대한 서글서글한 며느리가 되어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시아버님 생신 때는 나름 신경 써서 예쁜 커스텀 케이크도 주문해 보고 매달 시댁모임이 있는 날이면 할 수 있는 대로 쥐어짜 내서 잘 말하고 잘 웃곤 했다. 우리 엄마가 보면 처음보는 딸내미 내숭에 기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노력과는 다르게 시아버지께서 보시기엔 부족했는지 어느 날 시아버지는 나에게 시간 내서 한번 얘기 좀 하자시며 대화를 요청하셨다.
어느 날 울린 휴대폰 진동. 곧이어 액정에 뜬 세 글자
—아버님— !!!
보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다. 내 폰 액정에는 ‘아빠’ 라는 글자도 낯설었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영락없는 상사와 통화하는 부하직원의 굽신대는 모습이었다. 지금 내 앞에 시아버지가 안 계신데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질 않나 몸은 저절로 베베 꼬여졌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어디서 몇 시에 볼 지 약속을 정하고 통화 말미에 시아버지께서는
‘(남편 이름)이 없이’ 얘기하자고 콕 집어 말씀하셨다.
시아버지와 1:1 이라니.
약속을 잡고 나서부터 혼이 점점 빠져나가는 듯했다.
결혼하기 전에 한번 남편, 시아버님, 나 이렇게 셋이 한양대 근처 카페를 간 적이 있다. 상견례 전에 나의 친아빠에 대해 혹여나 우리 엄마 앞에서 말실수를 하실까 염려되어 시아버지께서 만드신 자리였다. 그때 나는 시아버지께 친아빠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조금도 없으며 차라리 없어졌으면 하는 존재라고 말씀드렸고 그 말을 들은 시아버님은 대뜸 친아빠를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답하셨다.
근데 왜인지 그 한마디가 아직까지도 내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있다. 아마 그쯤부터였을까? 나는 시아버지께서 나에 대해, 나의 가정사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신 줄 알았다. 그래서 용서하라고 쉽게 말씀하셨겠지 싶었다. 아니 알고있다한들, 용서하라는 말이 과연 제 3자가 쉽게 할 수 있는 말인 것일까?
약속의 날. 시아버님과 처음으로 단 둘이 마주하는 자리. 시댁 다 같이 보는 것도 아직 삐질삐질 대는 난데 옆에 남편도 없이 시아버님과 1:1로 앉아있으려니 손에 땀까지 나고 너무 긴장됐었다. 어디 카페였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날 시아버지께서는 시댁네 할아버지서부터 현재까지 김가네의 세계관에 대해, 그리고 지금의 가족사업과 그 사업을 통해 계획하고 있는 시아버님의 비전에 대해 장장 몇 시간을 걸쳐 일장연설을 하셨다.
‘대화’ 좀 하자고 하셔서 이제 슬슬 나에 대해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신다거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런 대화가 아니라 거의 일방적인 김가네 역사학 강론에 가까웠다.
김가네가 어떻게 살아왔고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시댁인 데다가 가족회사라는 것까지 처음 접해보는 내가 낯설어한다는 걸 인지하시곤 ‘한번 긴 설명이 필요하겠군’ 싶으셨던 모양이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시아버님과 단 둘이서 마주하는 자리이니만큼 없는 집중력 최대한 끌어모아 열심히 들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중간중간 정신이 잠시 다른 데 갔다 오기도 했다. 슬쩍 지나간 내 동태 눈깔을 시아버님께 들켰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에게 있어서 김가네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김밥집 김가네가 아닌 시아버지께서 사는 이유, 거진 인생의 전부 그 자체였다. 시아버님의 비전은 김가네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그 길고도 긴 김가네의 배경 설명의 핵심은 결국 이거였다.
‘너도 이제 김가네의 일원이니
우리 김가네의 룰에 따라야 한다’ 이꼴
‘우리 가족의 비전에 동참하라’
..
..
..
“가족은 하나로 뭉쳐야 돼. 우리 가족은 이 비전을 위해 함께 할 거야.”
“결혼하면 어차피 남편 쪽 가족이 되는 것이니..”
동태 눈깔은 온데간데없이 잠이 확 깨버렸다. 처음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앞으로 그걸 위해서 살라는 건가? 꼭 같이 해야 되나?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하게 있는지, 뭘 좋아하는지 물으셨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걸 알고 계셨던 시아버님은 내가 갖고 있는 손재주를 그 비전을 위해 사용하길 바라셨다.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할 것이니 며느리까지 당연히, 너무나 당연히 함께 하는 거라 생각하셨고 가족은 같이 해야 하는 거라고 늘 강조하셨다.
“너도 이제 김가네의 일원이니 알아야 한다. 함께 해야 한다.” ….
1:1 대화의 날, 시아버님은 당장은 부담이 되더라도 어차피 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덧붙이시곤 강론을 마무리하셨다. 추가로 시어머님께 안부 전화 잘 드리라는 당부까지 놓치지 않으셨다.
내가 부담을 느낄 거라는 걸 예상하셨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랬다. 지금은 나에게 부담이될지언정 그날의 그 강론은 시아버님께서 한 가족을 이루는 방식이었던 것이고 나도 그렇게 시아버지와 똑같은 마음이길 바라셨다. 이제 한 가족이 됐으니 이 울타리 안에서 함께 하길 원하시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 또한 아빠의 역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오로지 부담뿐이었다. 결혼한 지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때, 몇 시간을 걸쳐해 주셨던 시아버님의 긴 말씀들은 오히려 성급하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고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됐다.
화자의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청자의 듣는 자세가 삐딱했던 걸까.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활짝 열어두었던 문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굳게 걸어 잠근 것처럼 속이 답답해져 왔다. 관계는 혼자만의 것이 아닌데 이때 시아버지는 결혼하면 남편쪽 가족에 맞추는게 당연하다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전제로 하고 말씀하시는 내내 일방적인 화법과 태도를 유지하셨다.
이제 한 가족이라는 건 맞지만 '남편쪽 가족에 맞춰야 한다' 는 말은 어쩐지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그것들이 당연하다는 말에는 약간의 반감마저 들었다. 아직은 낯선 순간들이 더 많고 적응도 채 안 된 나에게 아버님은 서둘러 김가네를 이해시키기 바쁘셨고 시집 온 며느리는 시댁에 맞춰 살아야함을 너무도 당연하게 말씀하셨다.
25살에 결혼한 그때, 당장에 뚜렷한 꿈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비전에,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맞추고 싶다는 마음이 단박에 들진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아주 나중에 똑같이 말씀해 주셨다면 마음이 좀 달라졌을까? 결혼하자마자 훅 들어온 장황한 김가네의 세계관과 그에 따른 권유들이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사실 권유라기보다 권고에 가까웠다. 그 후로도 시아버지는 매번 가족모임 때마다 ‘함께, 같이’ 를 누누이 꾸준히 귀에 박히도록 강조하셨고 마치 우리 가족 비전을 위해 결혼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며느리까지 함께 하게 되면 비로소 김가네의 비전이 완성되는 것 같다며 시아버님께선 앞으로 김가네의 방향, 계획, 비전을 세우시며 긍정적인 꿈에 부풀어 계셨고 가족 모임 때마다 내심 시아버님의 속도에 맞추길 바라시는 듯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럴 수록 그 옆에 나는 점점 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다.
당연하게 여기는 그 순간이 관계의 첫 균열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뭐라도 말을 할 걸 그랬다. 나는 같이 할 생각이 없다던지 가족이라고 무조건 함께, 같이 해야 한다는 건 잘 모르겠다던지 당장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뭐라도 확실하게 말을 했어야 했다. 상대방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 같아서, 가족의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아서, 결혼하자마자 그냥 친구도 아닌 남편의 아빠를, 시아버지를 거절하는 게 어려웠던 나는 말도 못 하고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래 맞다. 말 못 한 내 잘못이다. 그 뒤로 시아버님과 나의 속도는 점점 벌어졌고 벌어진 속도만큼이나 말 못 할 갈등이 더 쌓여갔다. 그 갈등을 시작으로 남편과의 관계에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