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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집

<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10화

by 이봄



남편은 결혼하기 전부터 줄곧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해왔다. 그 말은 즉 시아버지께서는 그 사업장의 대표로 계신 것이고 그런 가족회사에서 함께 일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시댁 모임만 하면 오고 가는 대화의 8할은 회사 관련된 일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이제 막 결혼하고 시댁에 적응을 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적잖이 신세계였다. 25살의 이른 나이에 결혼, 시댁이라는 낯선 가족, 게다가 가족사업까지. 한 번에 3연타로 새로운 종목을 접해야 했던 그때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반지하 생활에 기초생활수급자 딱지를 붙이고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며 살던 우리 집안과는 달리 남편의 집은 회사를 안정적으로 굴리기 위해 전전긍긍했었고 월 180도 안 되는 월급으로 우리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던 우리 엄마와는 달리 남편의 가족은 생전 처음 들어 본 액수가 왔다 갔다 하며 회사의 안녕을 네 가족이 함께 고민하며 살고 있었다.


오해할까 봐 미리 확실히 얘기해 두자면 시댁의 사업장은 규모가 막 어마어마하게 큰 건 아니다. 순전히 나의 입장에서 우리 집에 비교했을 때. 전반적인 생활반경이 확실히 우리 집보다는 넓은, 어쨌든 나와는 다른 수저인 집일 뿐. 흔히 말하는 ‘부잣집’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남편의 집을 ‘다른 수저’라고 칭하는 이유는 시댁모임 때 나누는 대화 속 생전 듣도보도 못한 금액이 왔다 갔다 한 것도 물론 있지만 보증금 300~500만 원짜리 반지하방에서만 살던 우리 집과는 다르게 시아버지 이름으로 된 회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남편이 그 회사에 바로 취업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이미 출발점이 다른 세계였다.




어린 시절부터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시켜줄 테니 뭐든 말하라는 아버지를 둔 남편은 모른다. 우리 집은 형편이 좋지 않았고 엄마 혼자 벌어먹기도 벅찼으므로 하고 싶은 것 따위 저 멀리 버려둔 지 오래인 나는 남편마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렇다. 그때 느꼈던 어떤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은 아마 자격지심이었을 것이다. 보고 자라온 환경에 따라 자연스레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지만 이것들을 나 자신이, 내 입으로 말하는 순간 자기 연민으로 전락해 버리는. 겉으로 티 내기는 부끄러운 자격지심을 나와 제일 가까운 남편에게 갖고 있었다.



결혼하고서 남편과 시누이를 보고 또 그런 시댁을 보며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집이 이런 집이었으면 어땠을까? 아니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인 부모님이 계셨다면, 듣도보도 못한 큰돈이 왔다 갔다 하는 이 가족의 대화가 나에게도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익숙한 대화라면 어땠을까. ‘돈을 들여서 하고 싶은 걸 한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돈을 쓴다’는 개념은 우리 집에서는 꿈꿀 수 없는 것이었다. 돈 드는 일 말고 돈을 벌어들이는 일을 해야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돈이 들어가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서 대학을 포기했고 언제든 바로 할 수 있는 알바만 하던 나는 내가 담을 수 있는 꿈의 그릇까지 한껏 작아져있었다.





집안을 수저로 비유하는 풍자가 생겨났을 때 나는 단번에 생각했다. ’오 그럼 우리 집은 흑수저다!’

그렇긴 했지만 전혀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처럼 살았으면 살았지 나 흑수저라고 날 좀 불쌍히 여겨주소 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은 조금도 없다. 엄마한테 손 벌릴 필요 없이 내가 벌어서 갖고 싶은 것도 사고, 엄마 용돈도 조금씩 주고 알바로 벌어서 쓰고 싶은 데 쓰고 살았다. 다들 그러려고 돈 버는 거였으니까.


그렇게 겉으로 감추고 살았던 모양이다. 시댁모임 때마다 나오던 가족사업의 안녕을 도모하는 네 식구의 자연스러운 대화들이 언제부턴가 나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고 내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어떤 거였든 시댁이라는 가족, 새로운 환경이 낯선 게 당연한 건데 그땐 나도 모르게 불쑥 생겨난 자격지심이 내 마음 한가운데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걸 느낀 순간 시댁이 왠지 모르게 좀 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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