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일까, 지혜일까?

사람이니까 가능한 거지.

by 민시

얼마 전 25년 지기 베프가 옆 동네 신도시로 이사 왔다. 급 만남도 거부감이 없고 벨소리부터 이미 수다스럽다.

“지금 뭐 해?”

“애 하교 하기 전에 장 보러 가려고.”

“오케이, 나도 넘어갈게~!”

터널 하나만 거치면 바로 올 수 있는 거리다. 친구는 이사 온 이후로 자주 찾아온다.


외출하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가 801호 그의 목소리와 아이의 고집 섞인 울음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아무래도 출근한 와이프를 대신해 누나도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게 만만치 않은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커졌다.


아이가 우는 소리는 괜찮았다. 다만, 화장실에서 들리는 그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욕으로 또다시 반복되는 것은 아닐지, 내 눈이 벼르듯 화장실 천장을 향해 날카로웠다. 당장이라도 천장을 뚫고 그를 끌어내리고 싶었다.

“야! 이리 와! 고개 숙여. 야!! 어~어~! 아우 똑바로 서!” 그의 목소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배에 힘을 주며 소리를 내질렀다.

“설명하고 설득하자~!!” 나는 외치자마자 화장실 문을 탁! 무슨 용기일까, 왜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다 들렸을까? 혹여나 쫓아올까 심장이 쫄깃, 졸지에 신발은 신은 둥 마는 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떨리는 심장,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축지법을 가장한 줄행랑이다.

‘아니야. 지혜를 쫓느라 떨리는 심장일 거야.’


마트 주차장에 도착, 주차하고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친구의 차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다고 투덜대며 괜히 시비 거는 게, 타격감은 전혀 없었다. 좀 전까지 떨리던 심장은 오히려 안정감을 찾았다. 25년 지기라 가능한 걸까? 친구와 사이좋게 카트를 끌고 식품코너로 들어갔다. 각자 장부터 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재료를 가득 담고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새로 알게 된 이웃 엄마를 발견, 또 한 명의 참견쟁이다. 나는 급하게 카트를 돌려 못 본 척 지나가고 싶었으나, 딱 걸렸다.

“어우~ 민시씨는 반찬도 다 해 먹어요? 사 먹어, 사 먹어~ 여기 네 팩에 만 원이야~!”

“뭔 상관?!”

“어? 어.. 어..”


웃으며 먹인다는 게 이런 건가? 내가 오늘 왜 이러나, 왜 뜬금없이 반항심이 들었을까. 그녀는 나보다 어리다. 은근슬쩍 말을 놓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의 나와는 다른,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본 듯 당황해하며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동안 상대가 불편해할 분위기, 그 정적을 보기 싫어서 말을 아꼈지만, 가만히 소리도 못 내고 있다가 어떻게 되었더라? 무례한 이웃에게 무례한 대응은 싫지만, 내가 살고자 함이었다. 물론 그녀는, 혹은 누군들 별 뜻 없었다고 말할 테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간섭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마치,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수준으로.

“사 먹는 건 금방 질려서요오~ 다음에 봬요오~!”

“그.. 래요~” 그녀는 거리감이 생긴 듯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시, 계산대 앞에서 친구를 만났다.

“커피 사.”

“네가.”

“나 내일 눈썹 문신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 같이 가면 십만 원에 해준대.”

“글쎄.. 예전엔 눈 돌리면 편의점이 보이고, 또 눈 돌리면 카페가 보이는 게 신기했거든?”

“뭐래~”

“애를 낳고 눈 돌리니 아이스크림 무인가게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그러다 이젠 눈 돌리면 뭐가 보이는 줄 알아?”

“뭔데?”

“인형 뽑기. 운 좋으면 천 원에 뽑히는데, 운이 나쁘면 만 원을 써도 안 뽑혀. 십만 원? 그 돈이면 최소 2주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우리 애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

“하.. 이래서 내가 아이를 안 갖는 거야.”

“부럽다. 무자식 네 팔자.”

“야, 넌 좀 과해. 너처럼 살면 어후, 피곤해. 너무 피곤해.”

“그러게, 너처럼 살아야 편할 텐데.”

“이씨, 그래서, 진짜 안 간다고?”

“웅, 안가. 아메리카노 따듯한 거, 차가운 거 한 잔씩 주세요.”


한 시간 후, 친구와 헤어지고 아이의 하교를 도와 집으로 향했다. 지하 1층에 주차하고 올라가는 사이, 1층에서 문이 열렸다. 소란스러운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잔뜩 성이 난 남자 앞에서 802호 정훈 엄마의 붉어진 얼굴을 보았다. 어색한 경련이 만들어 낸 미소를 지으며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그의 입에 시선이 꽂혔다. 그는 이웃을 의식한 듯 잠시 말을 아꼈다. 얼핏 스치듯 보인 안경 쓴 눈만 봐도 11층 하성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먼저 올라가라며 뒤를 돌아보는 남자, 곧이어 진짜 하성이가 올라탔다.


얼마 전 영희 언니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 802호 정훈 엄마가 퍼뜨린 하성이의 소문이 하성이 부모에게까지 들어간 걸까? 하성이 엄마 앞에서는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하성이 아빠 앞에서는 비굴한 그녀의 태도가 당연한 듯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이날만큼은 작정하고 흔들어대는 하성이 아빠, 정훈 엄마의 자신[감]은 후드득 떨어지고 마지막 남은 붉어진 자존심마저 까치밥인 양 쪼이고 있는 모양새였다. 머지않아 그녀의 자존[감]은 철퍼덕, 바닥에 뒹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볼품없다고 해야 할까, 볼만했다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 탐내는 이들이 많으니, 내 송곳니는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영양가도 없잖아?

집으로 올라와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첵스 상자를 아이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곧장 영희 언니에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훈 엄마에게 무슨 일 있나요? 되게 난처해하던데?”

“어머! 언제~? 누구랑 있어?”

“지금 방금이요. 1층에서 하성이 아빠한테 그게 아니라고, 변명하듯이 말하던데요? 더 정확히 들은 건 없고요.”

“엊그제 한잔하다가 완전 뒤집어졌잖아~! 거기에 하성이 엄마랑 친한 엄마가 있었는데, 정훈 엄마가 그걸 모르고 하성이 욕을 한 거야. 그래서 그 엄마가 아무리 그래도 애 욕을 하는 건 아니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 그게 하성이 엄마한테 넘어간 모양이야.”

“잘못했네~ 말 조심 해야지.”

“그러게~~ 우리는 그냥 강 건너 불구경하면 돼~~”

순간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제일 친하게 지내면서도 이렇게 남의 일인 양 웃으며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만 보면, 사람마다 비열함도 지질함도 종류가 다양하다.


통화가 끝나고 나니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가 살짝 불안해졌다.

“아들~?”

아이는 부스럭 소리를 내며 움켜 쥔 첵스를 갖고 나왔다.

“언제 뜯었대?”

“먹으려고 뜯었다가 조금 흘렸는데, 모르고 또 밟아서 박살 났어요.”


처음이야 모르고 쏟아서, 당황해서 밟았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내 아들이다. 호기심에 밟고 또 밟았는지는 왜 안 봐도 보일까. 대체 누구 아들인가. 곧장 아이 방으로 갔다가 얼마 만에 뿜어보는 정수리 스팀인지 모른다. 한두 번 밟아서 박살 난 상태가 아니다. 당장 뒤돌아 아이를 향해 레이저를 쏘아대고 싶지만, 개구쟁이 키우며 지혜가 뭐 별거 있나? 더 이상 움직이며 사고 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 너그러운 엄마인 척 작고 여린 아이를 안아 붙들었다. 그리고, 작고 단단한 친구를 호출했다.

“하이 빅스비~ 아이방 청소해 줘~!”


남편이 너무 부담 갖고 살지 말라며 사준 로봇청소기다. 사줬으니 이용해야지. 나도 마음만 먹으면 나태해질 수 있는 거고, 소파에 늘어져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나는 뭐 사람 아닌가. 콩쥐도 열 일 하다가 스트레스받으면 일탈도 할 수 있는 거고, 열받으면 흑화 되어 팥쥐가 될 수도 있는 거지. 너무 합리화인가?


다음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한 802호 정훈 엄마는 체면이 구긴 채로 어색한 고갯짓을 보이며 인사했다. 어쩌면 그녀도 환경에 의해 언제든 꺾이고 찢기는 종이 인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보는 느낌이랄까? 그러게, 왜 저리 힘들게 살까,라고 나는 또 남 걱정을 왜 하는지. 나는 1층 단지 앞에서 엄마들과 만나 괜히 더 오버하며 웃음소리로 그녀를 긴장하게 했다. 긴장, 했겠지? 나만 아는 나의 지질함, 나는 한동안 그녀의 불편한 들숨날숨을 위해 부지런히 거리 두기를 하며 어슬렁거리고, 그녀의 불편한 비문증을 자초하며 눈앞에서 도도한 척, 최대한 많이 [알짱] 거렸다. 그게 소심한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벌이자 우아한 비열함이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나도 얼마든지 유치하게 비열해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건 인정한다.

‘좀 더 과감해지고 싶네?’














* 처음 써보는 소설입니다. 허술한 점이 있더라도 많은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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