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1)_배려는 하되,

남 걱정은 하지 않아.

by 민시

영희 언니를 편의점에서 만났다.

“왜, 전에 여행 자주 다닌다는 엄마 있잖아? 그 엄마가 이사 간다고 해서 어제 모였어. 그런데 그 엄마가 정훈 엄마한테 보험 해지하겠다고 한 거야.”

“그게 왜요? 그 엄마, 보험 억지로 들었던 거예요?”

“어, 그래서 분위기 싸해지고 정훈 엄마가 목소리 높였는데~ 더 웃긴 건 그 엄마가 벼른 듯이 목소리를 더 높인 거야~ 분위기 느껴지지? 그런데~ 요즘은 정훈 엄마가 엄마들 많이 의식하더라~? 바로 꼬리 내리고 알겠다고 했어. 그런데..”

사람 좋은 척, 괜찮은 척. 802호 정훈 엄마가 보험을 해지해 주겠다고 말한 순간, 모였던 엄마들이 눈치 보며 자신들도 해지해 달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단다.

“언니는요?”

“하.. 나는 말 못 했어. 나까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어. 나는 정훈 엄마를 잘 알잖아. 좀 불쌍해. 확실히 기가 꺾였어.”

영희 언니는 대체 무슨 책임감일까? 결국, 정훈 엄마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건가? 모두가 해지하겠다는데, 그 틈을 타 해지했어야지. 내 일이 아니니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40대 중반이 넘었으면 알아서 해야지.


에너지를 빼앗기는 기분에 손님이 왔다는 핑계를 댔다.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아이 음료만 사 들고 후다닥 편의점에서 나와 정문까지 뛰었다. 나는 여전히 지혜를 쫓았다고 합리화했다. 같은 아파트 이웃과의 거리 두기는 쉽지가 않다. 공동현관 앞, 꽂혀있는 우편물을 꺼내 들고 터벅터벅,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하루에 위험한 인물을 동시에 만나는 것도 쉬운 게 아닌데, 1층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정훈 엄마를 만났다. 어쩐 일인지, 이제는 가식적인 미소도 보이지 않는다. 표정이 없이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제일 낫다. 끝까지 거리 두기 하자. 그녀는 시들다 못해 바짝 마른 꽃처럼 톡,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았다.

‘무기력한 표정 같은데?’

나는 말없이 묵례만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희한하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집으로 향하는 복도가 한숨부터 나오더니, 이제는 숨통이 트인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춤을 춘다. 문을 열자마자 채광부터 반려견처럼 반겨주는 게,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이 기분 그대로, 며칠 전 원두 그라인더를 정리하고 이웃을 배려해 새로 구입한 커피 머신 앞으로 다가갔다. 한잔해야지.

“지잉, 또로로록..”

따듯하게 내려온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실 앞 식탁에 앉았다. 통창으로 전해지는 채광을 고스란히 받으며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위로 올라오는 연기를 통해 고소한 향미가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듬뿍 받아들였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엘리베이터의 검은 기운처럼, 이제는 내 손바닥 안에 올린 머그잔 속의 커피야말로 8층 그녀들이 갇힌 뜨겁고 검은 기운처럼 느껴졌다. 내 멋대로, 그녀들의 벗어나려는 마지막 일렁임으로 해석했다. 아직 마음에 응어리가 조금 남아 있어서인가, 나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따듯한 온기를 머금으려 그녀들을 꿀꺽 삼켜냈다. 그녀들이 아무리 쓰고 고약해도, 내 속은 충분히 소화할 만큼 튼튼해졌다. 물론, 이 고약함을 삼켰으니, 내 똥은 더 구려지는 거 아닌가 몰라.


좀 전에 꺼내온 우편물을 확인했다. 잠시 들고 있던 손을 눈앞 가까이 가져왔다.

‘801호? 이게 왜 여기 있어.. 독촉장?!’

801호의 지독한 현실을 마주한 것 같았다. 이래서 두 가정이 함께 살았을까? 우편물에 쓰여있는 빨간 네모 안의 독촉장이라는 글자를 한참 바라본 것 같다. 엄지 손가락이 꾸물꾸물, 양심은 꼬물꼬물. 사고 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1층으로 향했다. 801호에 조용히 꽂아놓고 올라왔다.


다시 집, 따듯한 물만 받아서 소파에 앉아 늘어져 보았다. 눈앞에 꺼져있는 TV 속에 비친 내 실루엣이 낯설었다. 스스로 저 검은 네모 속에 갇히면 곤란하지. 리모컨을 잡아 전원을 켰다. 여배우가 아이를 육아하는 과정이 TV 예능 프로그램에 고스란히 방영됐다. 어쩜, 목소리를 키워가며 놀아주는 것이 아이보다 신난 게 틀림없다. 물총놀이와 종이컵 쌓기, 쿠키 베이킹에 이어 에어 바이킹, 그리고 물감 놀이까지. 내가 아이에게 해 주던 놀이와 똑같은 게, 여배우도 역시 엄마다. 그녀가 카메라 밖에서 이웃들과의 모습은 어떨지 상상하며 그저 이웃을 잘 만났기를 바라는 내 모습에 피식 웃고 넘겼다. 물론, 남 걱정, 특히나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지 아마? 적어도 나보다는 잘 살 테니까.


한 달 후, 영희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나는 무슨 심리일까?

“민시야~ 바빠?”

“요새 공모전 준비하느라요~ 왜요?”

가까운 거리도 운전대를 잡으니 마주치는 횟수가 훨씬 줄었다.

“아니~ 시간 되면 차 한잔하려고 했지~”

만나봐야 또 이웃 뒷이야기 아닐까?

“지금 쓰는 글 마무리되면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 다들 바쁘구나~ 요즘 정훈 엄마도 출근한다고 바쁘다던데.”

“대중교통 이용하나 보네요?”

“응? 아닌데~ 정훈 엄마는 버스 싫다고 차 끌고 다니는데?”

“아 그래요? 아이 픽업하러 갈 때 주차장에서 본 것 같아서.”

“아~~ 그래~~?”


영희 언니는 같은 동이 아니니 확인할 생각도 없었을 테고, 의심도 안 했겠지. 곧이어 내가 무슨 글을 쓰는지, 몇 동 엄마들과 어울리는지 관심을 가졌지만, 정확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미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없는 게, 평소의 언니가 아니었다. 왜 802호 정훈 엄마는 영희 언니에게 바쁘다고 했을까? 정훈 엄마 차는 운전자석 와이퍼에 신도시 신축 아파트를 알리는 전단지와 함께 분홍색 행주가 꽂힌 채로, 늘 같은 주차 구역에 방치된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몸 사리나?


“딩동”

올 사람이 없는데, 밖으로 향하니 택배 상자가 와 있었다. 들고 들어오려다 현관 밖으로 벽 모서리에 낯익은 손님을 발견했다. 이사 오기 직전에 변기로 내려보내던 벌레들 중 한 녀석, 돈벌레 그리마, 그리마야 그리마야, 들어올 생각 하지 마라. 미안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 편하게 살고자 지긋지긋한 벌레들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니, 나는 벌받았던 걸까?

‘네가 아무리 익충이어도, 우리 집에 들일 수 없으니 그냥 가 줄래?’

살다 살다 벌레와 대화를 시도하는 게, 나의 미래를 알려주는 듯 고립된 내가 그려졌다. 아무렴 어때, 혼자여도 사부작사부작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남 걱정은 대체 왜들 하는지, 참견쟁이들과 함께할 시간에 글쓰기가 최고다.


잠시 후,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 지역 맘카페를 열어 엄마들에게 저녁 메뉴를 추천받으려 했다. 오랜만에 접속했는데, 먼저 내 눈에 띈 우리 아파트의 문의 글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클릭하고 보니 서울 사람이라고, 이사 예정이라며 우리 아파트가 살기 좋은지 묻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망할, 가뜩이나 집값도 떨어진 마당에 악플이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티스푼: "아는 지인이 거기 사는데 층간 소음 심하대요~! 아줌마들 말도 많고, 동네 곳곳에 쓰레기들 천지에~ 아주 여러모로 최악이에요~ 최악!!"

하.. 깊은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왜 악플만 보면 화가 솟구칠까? 나는 끓는 마음 한구석을 겨우 식히고,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랑맘: “저는 여기 실거주자예요~ 저는 이웃을 잘 만나서인지 정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 키우기에 최고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해요~^^ 이웃으로 만나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환영해요~~^^”


이 지긋지긋한 환경에서 탈출이 시급한 나에겐, 집값이 더 떨어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찝찝한 마음은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마음도 입도 무거운데, 왜 손가락은 한없이 가벼울까.

‘마음을 드러내는 악플이 나을까, 마음에도 없는 선플이 나을까?’










뒤이어 작가의 말도 동시에 연재합니다.:)








* 처음 써보는 소설입니다. 허술한 점이 있더라도 많은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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