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민주화의 응전 - 시민이 깨어나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는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IMF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 김영삼 대통령, 1997년 11월 21일 대국민 담화
2025년 현재 한국 사회를 가장 크게 지배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불평등'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계층 분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이 모든 문제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나게 돼요.
바로 1997년 IMF 외환위기입니다.
27년 전 그해 겨울, 한국 사회는 완전히 뒤바뀌었어요. 평생직장이라고 여겨졌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이 줄을 이었고, 가장들이 길거리에서 휴지를 팔았으며, 주부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IMF 위기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재앙이 아니었어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는 1987년 이후 10년간 성장해 온 한국 민주주의에도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어요.
과연 민주화와 경제발전은 함께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경제 위기 앞에서 민주주의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1990년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됐어요.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한 자본주의의 이름이 바로 '신자유주의'였어요.
한국도 이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부터 '세계화'를 국정 목표로 내세웠어요. 폐쇄적이었던 한국 경제를 세계 시장에 개방하고, 경쟁력을 높여 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것이었죠.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이를 더욱 본격화했습니다. "세계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며 금융 시장 개방, 자본 자유화, 규제 완화 등을 추진했어요.
▌[당시의 목소리] "이제 세계는 하나의 시장이 됐습니다. 우리도 문호를 개방하고 경쟁력을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 김영삼 대통령, 1994년 신년사
1994년 12월에는 'OECD 가입 추진계획'을 발표했어요.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서구 선진국 수준의 시장 개방이 필요했습니다. 금융 자유화, 노동 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등이 그 조건이었어요.
하지만 이런 정책들이 한국 경제에 어떤 위험을 가져올지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부족했습니다. 오직 "선진국 되기"라는 목표만 있었을 뿐이에요.
1990년대 들어 한국 재벌들은 공격적 확장에 나섰어요. 세계화 시대에 규모의 경제를 갖춰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봤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한보그룹이었습니다. 철강, 건설, 전자, 석유화학 등 3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이었어요. 하지만 실상은 부실했습니다. 과도한 차입으로 부채비율이 500%를 넘었고, 수익성도 낮았어요.
다른 재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삼성은 자동차 사업에, 대우는 조선업에, LG는 반도체에 무리하게 뛰어들었습니다. 모두 "빅딜"을 통해 덩치를 키우는 데만 몰두했어요.
문제는 이런 확장이 대부분 차입으로 이뤄졌다는 점이에요. 1990년대 중반 한국 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은 300%를 넘었습니다. 이는 미국(120%)이나 일본(180%) 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어요.
금융 시스템도 부실했습니다. 은행들은 재벌에 대한 대출을 늘리면서 위험 관리를 소홀히 했어요. 정부의 암묵적 보증이 있다고 믿었거든요.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습니다.
1997년 들어 한국 경제에 위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 신호는 1월 한보그룹의 부도였습니다. 당시 재계 14위였던 한보가 5조 원의 부채를 남기고 무너진 거였어요.
3월에는 기아자동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갔습니다. 현대차에 이어 국내 2위 자동차 회사였던 기아의 부도는 충격이었어요. 7월에는 대우그룹 계열사들도 줄줄이 부실이 드러났습니다.
더 심각한 건 외환 보유액이 급감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1996년 말 330억 달러였던 외환 보유액이 1997년 10월에는 300억 달러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일시적 어려움"이라며 낙관론을 폈어요.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체력)은 건전하다"라고 계속 강조했습니다.
1997년 11월, 한국은 외환위기에 직면했어요. 달러가 동났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자금을 빼기 시작하면서 달러 수요가 급증했지만, 공급할 외환이 부족했던 거예요.
11월 17일 정부는 환율 방어를 포기했습니다. 그동안 1달러=800원 대로 유지되던 환율이 하루 만에 1,000원을 넘어섰어요. 외환시장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기업들은 연쇄 부도 위기에 몰렸어요. 달러로 진 빚을 갚아야 하는데 환율이 폭등하면서 부채 부담이 급증한 거였습니다. 은행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해외에서 빌린 단기 자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우리나라가 외환 부족으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빠졌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 임창열 재정경제원 장관, 1997년 11월 21일
11월 21일, 정부는 마침내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해방 후 최대의 국가적 위기였어요.
1997년 12월 3일, 한국과 IMF 간에 구제금융 협정이 체결됐어요. 지원 규모는 550억 달러, 당시로서는 IMF 역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돈에는 조건이 따랐어요. IMF가 요구한 조건들은 한국 경제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들이었습니다.
첫째, 금리 인상이었어요. 당시 8%대였던 기준금리를 25%까지 올렸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이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을 급증시켰어요.
둘째, 긴축 재정이었습니다.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수를 늘려 재정 흑자를 내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경기가 나쁜 상황에서 긴축 재정은 불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셋째, 구조조정이었어요.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을 정리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만 살아남게 하라는 것이었죠. 시장 원리에 따른 구조조정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대량 실업이 불가피했어요.
넷째, 시장 개방 확대였습니다. 외국인의 국내 기업 인수를 허용하고, 금융 시장도 완전히 개방하라는 것이었어요. 이는 한국 경제의 주권을 상당 부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됐어요. IMF 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정권을 인수한 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어요. 야당 후보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최초의 사례였거든요.
김대중 정부는 "IMF 조기 졸업"을 목표로 강력한 구조조정에 나섰어요. 하지만 동시에 "고통분담"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계층이 함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당시의 목소리]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습니다. 모든 국민이 함께 고통을 나누고, 함께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갑시다" - 김대중 대통령, 1998년 취임사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분담이 공평하게 이뤄지지 않았어요. 노동자와 서민들의 고통이 훨씬 컸거든요.
IMF 구조조정의 가장 큰 충격은 대량 실업이었어요. 1997년 말 2.6%였던 실업률이 1998년에는 7%까지 치솟았습니다. 실업자 수가 178만 명에 달했어요.
특히 40-50대 가장들의 실업이 심각했습니다. 평생직장이라고 믿었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권유받았어요. 하지만 이 나이에 재취업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길거리에는 "IMF 벤더"들이 나타났어요. 양복 입은 중년 남성들이 껌이나 휴지를 파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전직 회사원들이었어요.
가정 경제도 파탄 났습니다. 가계 소득이 급감하면서 생활수준이 크게 떨어졌어요. 자녀 교육비를 줄이고, 외식을 포기하며, 생필품도 아껴 쓰는 게 일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의 씨앗은 있었어요. 바로 1998년 1월부터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이었습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가정에 있는 금을 내놓아 외채를 갚는 데 보태겠다는 운동이었어요. 반지, 목걸이, 금니까지 내놓는 시민들의 모습은 전 세계의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불과 한 달여 만에 350만 명이 참여해 227톤의 금을 모았어요. 이는 당시 21억 달러 상당의 가치였습니다. 물론 외채 총액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국민적 단합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어요.
하지만 이런 국민적 희생과 달리, 기업과 부유층은 오히려 기회를 잡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실기업을 헐값에 인수하거나, 외국 자본과 합작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였어요.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고용 형태의 변화였어요. 정규직 일자리가 대거 사라지고, 대신 비정규직이 급증했습니다.
1997년 이전까지 한국은 '평생직장' 문화가 강했어요. 한 번 들어간 회사에서 정년까지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IMF 이후 이런 문화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기업들은 "고용 유연성"을 내세우며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렸습니다. 경기가 나빠지면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선호한 거였죠.
1997년 23%였던 비정규직 비율이 2000년에는 32%로 급증했어요. 이후에도 계속 늘어나 현재는 36%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였어요.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은 60-70% 수준이었고, 복리후생이나 승진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노동시장이 이중화된 거였죠.
김대중 정부는 재벌 개혁에도 적극 나섰어요. 과도한 차입 경영을 막고, 투명성을 높이며,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제한하려 했습니다.
1998년 1월 재벌들과 '5대 개혁 과제'에 합의했어요. 재무구조 개선, 중복 투자 조정, 계열사 간 지급보증 해소, 경영 투명성 제고, 책임 경영 확립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일부 성과도 있었어요. 현대는 계열사를 절반으로 줄였고, 삼성은 자동차 사업을 포기했습니다. 재무구조도 개선돼 부채비율이 200% 아래로 내려왔어요.
하지만 근본적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도는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위기 과정에서 중소기업들이 대거 망하면서 재벌의 상대적 지위가 더욱 높아진 거였습니다.
무엇보다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고리는 끊어지지 않았어요. 정치자금 제공과 특혜 제공의 고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IMF 위기는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정착시키는 계기가 됐어요. 위기 이전까지는 "개발독재 모델"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지만, 위기 이후에는 완전히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됐습니다.
금융 시장이 완전히 개방됐고, 외국인 투자가 대폭 늘어났어요. 2000년 초 외국인 주식 보유 비중은 30%를 넘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외국 자본에 인수됐어요.
노동 시장도 "유연화"됐습니다. 정리해고가 합법화됐고, 파견근로가 확대됐어요. 노동조합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사회보장제도는 일부 확충됐지만 여전히 부족했어요. 실업급여가 도입되고 국민연금이 확대됐지만, 비정규직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었습니다.
IMF 위기는 87 체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경제적 어려움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경제적 효율성이 민주적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경제를 살리려면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어요.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보다는 협조가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했어요.
시민사회도 변화했습니다. 1990년대까지 정치 개혁을 중심으로 했던 시민운동이 복지, 환경, 소비자 권익 등 생활 밀착형으로 바뀌었어요. 물론 이것도 의미 있는 변화였지만, 정치적 견제 기능은 약화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도 나타났어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 방식이 다양해졌고, 2002년 월드컵과 촛불집회 등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시민 참여가 나타났습니다.
2025년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IMF 위기에서 비롯됐어요. 비정규직 문제, 경제적 불평등, 청년 실업, 저출산 등이 모두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하지만 IMF 위기가 가져온 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어요. 경제 시스템이 투명해졌고, 국제 경쟁력도 높아졌습니다. 무엇보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저력이 확인됐어요.
중요한 건 교훈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경제 성장만으로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IMF 위기가 보여줬거든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 등을 겪으면서 우리는 또다시 경제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IMF의 교훈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4장 17화: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민주주의 후퇴: 87 체제의 위기" -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보수 정부 9년이 어떻게 87 체제를 후퇴시켰는지, 그리고 이에 맞선 시민 저항이 어떻게 촛불혁명의 토대가 됐는지 분석합니다.
[용어 해설]
IMF 외환위기: 1997년 한국이 외환 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사건. 신자유주의가 본격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신자유주의: 시장의 자유와 경쟁을 강조하는 경제 이념. 규제 완화, 민영화, 자유화를 통해 경제 효율성을 추구하지만 불평등 확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정규직: 정규직과 달리 고용이 불안정하고 임금이나 복리후생에서 차별받는 노동자들. IMF 위기 이후 급속히 확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