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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말의 전쟁 15화

말의 전쟁

제4부 해체되는 질서, 남는 것은 주권뿐

by 한시을

14화 질서가 무너질 때: 혼돈 속에서 길 찾기


▌2024년 한 해 동안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이 행사된 횟수는 18회였다. 이는 냉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결의안만 12차례 거부당했다. 중동 문제로 4차례, 기후변화 대응에서도 2차례 막혔다. 세계 평화를 지킨다던 유엔이 사실상 무력화된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도 2019년부터 기능이 정지됐다. 미국이 상급위원 임명을 막으면서다. 국제법을 관장하던 기구가 5년째 멈춰있다. 이것이 2025년 국제질서의 현실이다. 80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규칙들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다. 과연 그 다음은 무엇일까.


무너지는 세계의 규칙들


1945년 이후 80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로 시작된 경제 질서부터 보자.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을 거쳐 WTO까지. 이 모든 것이 미국 중심으로 설계됐다.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고, 미국식 자유무역이 표준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브릭스(BRICS) 경제 규모가 G7을 넘어섰다. 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브릭스 5개국의 구매력평가 기준 GDP가 35.6조 달러로 G7의 35.4조 달러를 앞질렀다. 경제적 힘의 균형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정치적 질서도 마찬가지다. 유엔이 만들어질 때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이 "승전국"으로서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됐다. 하지만 8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이 여전히 세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인도의 인구는 14억 2천만 명으로 중국을 넘어섰다. 브라질은 남미 최대 경제국이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기술 질서는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인터넷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미국이 모든 것을 관리했다. 도메인 시스템, 인터넷 표준, 주요 플랫폼 모두 미국 기업들이 장악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의 틱톡이 미국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런 변화는 우연이 아니다. 역사의 필연이다. 모든 질서는 언젠가 수명을 다한다. 문제는 그 다음에 무엇이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주나라 질서의 붕괴와 혼란


2,7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주나라 중심 질서의 붕괴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부터 800년간 중원을 지배했다. 봉건제라는 질서를 만들어 안정을 유지했다. 주왕이 꼭대기에 있고, 그 아래 제후들이 있고, 제후 밑에 대부들이 있는 계급 사회였다.


이 질서는 나름 효과적이었다. 각자 자기 역할이 정해져 있었고, 분쟁이 생기면 주왕실이 중재했다. "예(禮)"라는 규칙이 있어서 모든 것이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기원전 8세기부터 이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철기 기술이 보급되면서 생산력이 급증했다.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늘었다. 변방의 나라들도 빠르게 성장했다.


문제는 새로운 현실과 낡은 제도 사이의 괴리였다. 제나라는 이미 주나라보다 강했지만, 여전히 주왕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초나라는 남방의 대국이 됐지만, 중원에서는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


기원전 770년, 주나라 수도가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진 것이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견융족의 침입으로 서주가 멸망하고 동주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주왕실의 실권은 급속히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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