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해외문학과 욕망의 보편성
혼자 있고 싶은 적 있으신가요?
가족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동료들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갑자기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말입니다.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죠. "왜 나는 가족과 함께 있는데도 불행할까?"
"왜 혼자 있고 싶은 걸까?"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외로움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의 손길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 손길이 부담스럽습니다.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1919-2013, 영국,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19호실로 가다》는 바로 이 '촉(觸)'의 역설을 다룹니다. 접촉, 스킨십, 관계. 우리가 가장 원하면서도 가장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하늘 (시대정신, 질서)
1960년대 영국 런던. 전통적 사회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기였지만, 여전히 강력한 규범이 있었습니다.
"좋은 아내가 되어라. 좋은 엄마가 되어라. 행복한 가정을 꾸려라."
하늘이 던진 먹이는 명확했습니다. 결혼, 출산, 육아, 가사.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들이었습니다.
먹이 (욕망의 대상)
Primary 먹이: 촉(觸) - 혼자 있을 권리, 타인의 접촉에서 벗어날 자유
Secondary 먹이: 향(香) -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수잔 로링즈는 무엇을 원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매튜, 네 명의 건강한 아이들, 정원이 딸린 하얀 집, 가정부까지.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잔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시간과 공간. 촉(觸)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수잔 로링즈는 젊은 시절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었습니다. 광고회사에서 일했고, 아름답고, 똑똑했습니다. 매튜는 대형 신문사의 차장급 기자였습니다. 둘은 "적절한"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수잔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2년이 흘렀습니다.
수잔이 해야 할 일은 끝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을 차리고, 학교에 보냅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장을 봅니다. 아이들이 돌아오면 간식을 주고, 숙제를 도와주고, 저녁을 차립니다. 남편이 돌아오면 하루 이야기를 듣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눕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설거지하고, 내일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수잔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접촉"당합니다.
아이들이 안아달라고 합니다. 남편이 어깨를 주물러달라고 합니다. 가정부 소피가 오늘 메뉴를 물어봅니다. 학교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 상담을 요청합니다.
손, 몸, 목소리, 시선. 끊임없는 접촉입니다. 수잔만의 시간은 없습니다. 수잔만의 공간도 없습니다.
"막내 쌍둥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면, 9시부터 4시까지는 집에서 떠나 있게 될 것이다. 수잔은 그 시간이 가정의 중추 역할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삶을 가진 여자로 서서히 변해 가는 준비기간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쌍둥이가 학교에 가도, 수잔의 시간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장보고, 요리하고... 여전히 "아내", "엄마", "안주인", "고용주"의 역할이 그녀를 옭아맸습니다.
매튜는 착한 남편이었습니다. 수잔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당신만의 방이 필요한 것 같아."
매튜는 다락방을 꾸며 '엄마의 방'으로 만들어줬습니다. 수잔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방은 또 하나의 거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들이 올라와 놀고, 가정부 소피가 빨래를 가져다 놓고, 남편이 신문을 읽으러 올라왔습니다.
"엄마, 여기 있었어요?"
"수잔,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소피가 오늘 장을 못 봤다는데, 어떻게 할까?"
'엄마의 방'은 여전히 '엄마'의 공간이었습니다. 수잔 자신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수잔은 깨달았습니다. 집 안에서는 절대 혼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수잔은 집을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공원에 갔습니다.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불안했습니다. "수잔, 왜 여기 있어요? 아이들은요?"
다음에는 영화관에 갔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것도 피곤했습니다. 혼자 '있고' 싶은 것이지,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수잔은 패딩턴의 허름한 호텔을 찾았습니다. 프레드 호텔. 19호실.
"지저분하고, 초라하고, 낡은" 방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잔에게는 천국이었습니다.
왜?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 곳에 있으면 행복해요. 난 사실 그 곳 없이는 존재하지 않아요."
수잔은 19호실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천장을 바라봤습니다. 생각에 잠겼습니다. 때로는 잠을 잤습니다.
아무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안아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오늘 저녁 뭐 먹지?"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촉(觸)의 부재.
그것이 수잔이 원한 전부였습니다.
수잔 로링즈(Susan Rawlings): 40대 중년 여성, 네 아이의 엄마, 매튜의 아내, 과거 커리어우먼
매튜 로링즈(Matthew Rawlings): 수잔의 남편, 대형 신문사 차장급 기자, 착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네 아이들: 수잔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존재들
소피(Sophie): 독일인 가정부, 수잔의 또 다른 역할(고용주)을 상기시키는 존재
수잔의 의(意)가 추구한 것
"나만의 시간과 공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곳. 촉(觸)에서 벗어나는 자유."
이것이 수잔의 의(意)가 추구한 촉(觸)이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촉의 부재를 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향(香)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엄마도, 아내도, 안주인도 아닌, 수잔 자신.
하지만 하늘이 던진 것은 달랐습니다. "좋은 아내가 되어라. 좋은 엄마가 되어라. 가족을 돌봐라."
불일치가 발생했습니다.
구부득고(求不得苦)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수잔이 원한 것은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영국 사회는 기혼 여성이 혼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있으면 가족이 부릅니다. 밖에 나가면 "왜 집에 안 있어요?"라는 시선을 받습니다. 호텔에 가면 "남편 없이 혼자?"라는 의심을 받습니다.
수잔은 19호실을 얻었지만, 그것조차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돈도 문제였고(매주 5파운드를 남편에게 요구해야 했고), 시간도 문제였고(오래 있으면 의심받았고), 무엇보다 죄책감이 문제였습니다.
"나는 나쁜 엄마인가? 나쁜 아내인가?"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을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
수잔이 미워한 것은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역할이었습니다.
매일,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 "여보"라는 호칭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 호칭들이 수잔을 정의했습니다. 수잔 자신은 사라지고, 역할만 남았습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 - 존재 자체의 괴로움
수잔의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19호실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안아주면서도, 남편과 대화하면서도, 마음은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었습니다. 이것이 오음성고입니다.
매튜는 수잔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챘습니다.
매주 같은 시간에 외출합니다. 돌아올 때는 평온한 얼굴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매튜는 두려웠습니다. "혹시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닐까?"
그는 사립탐정을 고용했습니다. 탐정은 수잔을 미행했고, 프레드 호텔 19호실을 알아냈습니다.
매튜는 충격받았습니다. "호텔? 남자가 있는 건가?"
하지만 탐정은 보고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녀는 혼자 있습니다. 그냥 누워 있습니다."
매튜는 더 충격받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고 싶어서 호텔에 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매튜가 물었습니다. "대체 왜? 무슨 일이야?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수잔은 깨달았습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난 1년간 난 매우 지저분한 한 호텔 방에서 낮시간을 모두 보내왔어요. 그 곳에 있으면 행복해요. 난 사실 그 곳 없이는 존재하지 않아요."
"자신이 그렇게 말할 때 남편이 얼마나 무서워할까, 그녀는 깨달았다."
그래서 수잔은 거짓말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이 상상하는 것처럼 나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어요."
불륜이라는 거짓말이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촉(觸)으로부터의 도피는 설명할 수 없는 욕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매튜는 수잔의 "불륜"을 용서했습니다. 심지어 자신도 바람을 피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넷이서 더블데이트라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수잔은 절망했습니다.
19호실조차 이제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튜가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수잔은 19호실로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스 밸브를 틀었습니다.
"가스가 작게 쉭쉭거리며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만족스러운 공허감 속에서 어두운 강물로 떠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잔은 죽었습니다.
왜? 완벽한 촉의 부재를 얻기 위해.
죽음만이 유일한 도피처였습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곳.
무상(無常): 관계도 변한다
수잔과 매튜의 사랑도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12년이 지나며, 역할로 굳어졌습니다.
무상입니다. 모든 관계는 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관계가 영원하기를 원합니다.
집착: 역할에 대한 집착
수잔의 괴로움은 역할에 대한 집착에서 왔습니다. "나는 좋은 엄마여야 해", "나는 좋은 아내여야 해". 이 집착이 수잔을 옭아맸습니다.
만약 수잔이 "완벽한 엄마"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1960년대 사회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의 관점
하늘이 던진 것: 1960년대 가부장제 - 아내의 역할, 엄마의 역할, 끊임없는 촉(접촉)
수잔이 추구한 것: 촉의 부재(혼자 있을 자유) + 향(정체성)
불일치 → 도피(19호실) → 발각 → 절망 → 죽음
Primary 욕망은 촉(觸)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촉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Secondary 욕망은 향(香)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역설적입니다. 촉은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 스킨십, 관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벗어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촉의 괴로움입니다.
도리스 레싱은 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까요?
《19호실로 가다》는 196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읽힙니다.
왜?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수잔의 이야기는 1960년대 런던 중산층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2025년 서울의 직장인, 뉴욕의 대학생, 파리의 예술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욕망은 보편적입니다.
레싱은 촉(觸)이라는 감각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꿰뚫었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손을 잡고 싶으면서도, 손을 놓고 싶어 합니다.
이 역설적인 욕망을 레싱은 19호실이라는 구체적 공간으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레싱은 설명할 수 없는 욕망의 비극을 보여줬습니다.
수잔은 매튜에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왜? 매튜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사회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은 정신병으로 취급받았습니다. 특히 완벽한 가정을 가진 여성이 그런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비정상으로 여겨졌습니다.
레싱은 이 사회적 억압을 날카롭게 포착했습니다.
[작품 정의]
《19호실로 가다》는 완벽한 가정을 가진 중년 여성이 촉(觸, 끊임없는 접촉과 관계)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호텔 19호실에 숨었다가, 그 욕망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결국 가스 자살로 완벽한 고독을 선택한 이야기이며,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역설적 욕망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증명한다.
2025년 현재, 우리는 여전히 19호실을 찾고 있습니다.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 주말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 퇴근 후 집에 바로 가지 않고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왜? 혼자 있고 싶어서.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도 비슷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이 잠든 후, 혼자 거실에 앉아 멍하니 있는 시간. 그것이 김지영의 19호실이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촉(觸)으로부터의 도피. 관계로부터의 해방.
SNS는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24시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연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읽씹", "잠수". 메시지를 읽고도 답장하지 않습니다. 왜? 혼자 있고 싶어서.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백했습니다. "재택근무가 좋다." 왜? 사람들을 안 만나도 되니까. 촉(접촉)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외로워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포옹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촉(觸)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손을 잡고 싶으면서도, 손을 놓고 싶어 합니다.
수잔은 1960년대에 이 역설을 살았고, 우리는 2025년에 같은 역설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레싱은 답하지 않습니다. 단지 보여줄 뿐입니다. 수잔이 19호실을 찾았고, 그곳조차 안전하지 않았고,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것입니다. 타인의 19호실을 존중하는 것.
누군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왜?"라고 묻지 않는 것.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의 19호실을 찾는 것. 죽음이 아니라, 삶 속에서.
[다음 회 예고] 제3부 18회: "법의 괴로움 –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50년 가까이 "고도"를 기다립니다. 법(法)이란 무엇일까요? 의미, 목적, 구원. 우리는 무언가를 믿고 기다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고도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면? 기다림만 남는다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법(의미)이 부재한 부조리한 세상에서도 그래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색성향미촉법 중 마지막, 법의 괴로움.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정말 올까요? 오지 않아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야 할까요?